누란(樓蘭, Loulan)은 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 로프노르(방황하는 호수로 불렸던 내륙호) 주변에 번영했던 고대 왕국이다. 본래는 크로나이나(Kroraina)를 국명으로 했다. 누란은 중국어의 와전이라고 한다. B.C 2세기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다. 흉노와 한족 세력 간에 끼어있으면서도 교통로상의 중요성 때문에 번영을 구가했고 독자적인 문화를 쌓았다. 중앙아시아의 원주민과 티베트계와 이란계의 혼혈민족으로 그 위에 인도계의 지배층이 있었다고 한다.
누란 고성(古城)의 흥망성쇠는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란 오아시스는 왜 쇠퇴했는가? 누란 고성의 흥망성쇠는 어떻게 된 것인가? 누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이런 문제는 천년을 내려오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란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지세가 험하고 모래언덕이 종횡으로 교체한다. 풍식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야르당(Yardang)’이 파도처럼 펼쳐져 있다. 주변에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황색이요 담회색의 모래바다다. 생명이란 찾아보기 힘든 황량하고 적막한 세계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상인, 참배객, 승려, 도굴꾼, 탐험가들이 그곳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누란은 그래서 ‘사막의 버뮤다(Bermud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동진(東晋) 승려 법현(法顯)이 그곳을 거쳐 인도로 갔다. 그의 여행기에는 그곳의 자연환경에 대해 “사하에 악마와 열풍이 많아 만나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하늘에는 새들이 보이지 않고 땅에는 어떤 짐승도 살지 않는다. 그곳을 벗어나려면 오직 죽은 사람의 인골을 표지로 삼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3세기 초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유럽에서 중국으로 건너올 때 누란을 경유했다. 그는 “이 사막은 죄악과 유령이 난무하는 지역이다. 그것들은 여행객들을 희롱해 환각에 빠지게 하여 훼멸의 심연으로 빠뜨린다.”고 묘사했다.
19세기 이전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지대의 고대 문명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저 극소수의 도굴꾼들이 드나드는 나루터와 다름없었다. 1895년 2월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이 처음 로프노르 지역에 들어서서 사막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탐험 과정 중 돌풍을 만나 길을 잃었는데 다행히도 물새 한 마리가 그를 조그마한 못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헤딘이 2번째 타클라마칸 여행은 희극적인 요소가 많다. 1899년 9월 스벤 헤딘이 스웨덴 국왕 오스카와 백만 부자 벨의 지원 아래 타클라마칸으로 제2차 탐사를 떠났다. 헤딘 일행은 작은 배를 타고 야르칸드(Yarkand) 강을 타고 타림(Tarim) 강을 지나 약강(若羌) 오아시스에 다다랐다. 1900년 2월 그는 또 여행단을 조직하여 로프노르(Lop Nor, 羅布泊)로 탐사를 떠나 3월 29일 로프노르 서북 기슭에 닿았다. 로프노르란 청(淸)의 강희제가 쓴 『황흥전람도(皇興全覽圖)』에 등장하는 신비의 호수다. 몇 차례 탐험대가 조직돼 그 로프노르를 찾아 나섰지만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었다. 이 호수는 나중에 1929년 헤딘에 의해 발견됐다. 놀랍게도 수원(水原)인 타림 강의 물길이 변해 위치나 면적마저도 변하는 ‘방황하는 호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헤딘이 야영을 준비하던 중 전날 머물렀던 지역에 삽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망망한 사막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삽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우물 파는 도구였다. 헤딘은 어쩔 수 없이 길 안내인 알더커(艾爾德克)에게 되돌아가서 찾아오라 했다. 알더커는 곧바로 출발해 배고프고 목마름을 견디며 헤매다 다행히 삽을 찾을 수 있었다. 돌아오던 중 갑자기 광풍이 일었다. 휘날리는 모래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방향을 잃었다. 바람이 멈춘 후 알더커 눈앞에 거대한 흙탑과 건축물 유적지가 펼쳐졌다. 처음에는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신기루 현상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모래바람에 반쯤 묻힌 고성(古城)임을 알아챘다.
알더커가 고성 유적에서 목조유물을 가지고 가 헤딘에게 알렸을 때 헤딘이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을지! 헤딘의 탐험 일기에 당시의 심정을 “정교한 카르투시 문양과 풀잎 문양 조각을 보자 내 눈이 부셨다. 나는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너무나 우둔한 게 아니던가! 우리는 이틀 정도 마실 물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내년 겨울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그 고성으로 다시 오기로 결정했다.”고 적고 있다.
헤딘은 알더커의 발견이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직감했다. 분명 “아시아 중부 고대사에 일찍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광명이 비칠 것”임을 예감했다. 그래서 헤딘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이듬해 봄에 다시 사막 속에 잠들어 있는 신비한 고성을 찾아 나섰다. “흙탑 아래에서 장막을 치고” 오랫동안 발굴해 150건의 위진(魏晉) 시기 중문 목간과 잔지, 소량의 카로슈티(Kharosthi) 문자와 한당(漢唐)의 고대 화폐, 그리고 각종 비단과 조각품을 발굴했다.
귀국 후 헤딘은 고성에서 출토된 간독(簡牘)에 쓰여 있던 ‘Koraina’를 근거로 자신이 발굴한 고성이 바로 중국 고대사에 기록돼 있는 ‘누란’임을 밝혀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파문이 일었다. 이후 누란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고고학 성지가 됐다. 누란의 유물은 각국 탐험가들의 앞 다퉈 발굴하는 대상이 됐고.
헤딘이 처음 누란을 발견한 이후 동양학 학자이자 탐험가인 영국 국적의 헝가리 사람 스타인(Stein)이 1906년과 1914년 2차에 걸쳐 누란과 주변 유적을 발굴했다. 한(漢)대 비단, 건축 부재, 그리고 중문, 카로슈티, 소그디아나(Sogdiana)목간과 잔지를 포함한 출토 유물들을 가지고 갔다. 그 많은 유물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 다음으로 일본 정토종단에서 파견한 탐험가 오타니 고즈이가 누란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막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유적지에서는 불상과 불화, 사원 유적, 다수의 문서 등이 발견됨으로써 전설로만 존재했던 누란 왕국도 어느 정도 신비의 베일을 벗게 됐다. 유명한 ‘이백문서(李柏文書)’는 바로 그가 발견한 것이다. 이백은 『진서․장준전』에 보인다. 전량(前涼) 시기에 서역 장자(長史)로 부임했다. 이 문건의 발견으로 전량 시기에 어떻게 서역을 경영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고즈이는 출토 지점을 기록하지 않아 이 문서의 발굴 지점과 문서 속에 기록된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해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1910년 고즈이는 러시아를 통해 위구르로 건너가 로프노르 서쪽을 탐험하면서 많은 누란 유물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인도 누란 유물 발굴 대열에 참여했다. 1909년 러시아인 아우덴버그(Oudenburg)가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다가 1910년 2월 하순에 로프노르 지역에 도착했다. 아우덴버그는 누란에서 독일 탐험대 그렌빌(Grenville)과 만났다고 전하는데 그들이 누란에서 발굴한 유물에 대한 어떤 기록도 지금까지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
누란 왕국은 실크로드 동부 지역의 요충지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실크로드의 중국 쪽 출발점인 돈황에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 가며 약 16일 정도 가면 로프노르 부근에 있는 누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는 여기서부터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진다. 여행자들은 두 길 중 어느 쪽으로 가든 누란에서 충분히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나야 했다. 이렇게 누란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보급기지로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누란 왕국의 전체 인구는 2, 3만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인구를 유지할 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누란이 그만큼 여유 있는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란의 중심이었던 누란성은 약 10미터 높이의 불탑을 중심으로 한쪽 면이 310~330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불탑 부근에서는 고급 목조 건축물 흔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漢)나라의 군 사령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흔적이 있다. 도시 가운데로 로프노르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가 있었다. 이는 사막지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원이었다. 이 급수원이 누란의 중요성을 한층 더 높여주었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상인들은 이곳에서 준비를 단단히 한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누란 왕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지질 조사를 비롯한 다각적인 조사를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은 역사의 궤적을 그렸던 것으로 판명됐다.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누란 주변에는 약 1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B.C. 1000~400년경에는 로프노르의 수위가 상승해 농경과 목축이 번성했으며 실크로드 전역에 교역이 활발해진 B.C. 300년대 무렵에는 도시국가가 성립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누란이라는 말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B.C. 176년이다.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B.C. 176년 한(漢) 문제(文帝)에게 보낸 편지 속에 “누란을 종속시켰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그 후 흉노족과 전쟁에서 승리한 무제(武帝)가 하서회랑에 돈황군(郡)을 비롯한 4군을 설치해 직할지로 삼았다. 후한(後漢)에 와서 한의 지배체제가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자 누란에 대한 기록도 점차 줄어든다. 누란 유적에서는 3세기경의 모직물을 비롯한 다수의 교역품이 발굴됐다. 누란이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는 2-4세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후 누란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발굴된 문물과 자료를 보면 누란은 한 시기 성세를 누렸음이 확실하다. 4세기 이후 누란은 갑자기 황사에 뒤덮인 폐허로 바뀌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이 고대 문명국을 꿈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을까? 누란 고성 유적지에서 발굴한 간독(簡牘)을 보면 누란 병사들의 배급 식량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고한 내용이 있다. 장교들도 그들에게 절약할 여러 방도를 강구하라 요구하기도 하고. 식량이 부족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이 악화됐다고 본다. 생태계가 균형을 잃고 수원(水源)이 고갈되면서 나날이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출토된 문서에는 용수 부족, 파종할 수 없는 상황 등이 기록돼 있다. 용수 배급을 요구하고 수원 관리를 엄격히 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4세기 경 로프노르 지역에 자연 환경이 급속하게 변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누란인들은 분명 자연 환경에 적응하고 개선하려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는 최악의 결과가 도래했을 것이고.
황사는 화려했던 황국을 뒤덮어 버렸다. 휘황찬란했던 문명도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이백(李白)의 「새하곡(塞下曲)」
五月天山雪,無花祇有寒.(오월천산설,무화기유한)
오월에도 천산엔 눈이 쌓여 꽃은 없고 추위만 있을 뿐이네.
笛中聞折柳,春色未曾看.(적중문절류,춘색미증간)
절양유 피리소리 들려오지만 봄빛은 아직 볼 수 없구나.
曉戰隨金鼓,宵眠抱玉鞍.(효전수금고,소면포옥안)
새벽에는 종과 북 따라 싸우고 밤이면 말안장 끼고 잠드나니.
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원장요하검,직위참루란)
허리에 찬 칼 뽑아 곧바로 누란을 베어버리리라.
여전히 역사의 풍진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궁금해진다, 누란은 왜 사람이 가지 않는 사막으로 바뀌었는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