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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성(長城)은 춘추전국 시대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각 나라는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지세가 험한 위치를 이용해 각지에 장성을 축조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기원전 214년 진, 조(趙), 연(燕) 3국의 장성을 하나로 이었는데 역사에 ‘만리장성’이라 칭하는 게 그것이다. 이후 한(漢), 위(魏), 수(隋), 명(明) 시기에도 장성은 끊임없이 축조됐다. 현존하는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에 건축한 것으로 길이 6700킬로미터인 세계문명의 기관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지구촌에 널리 알려져 있다. 중원의 한족 통치계급이 북방 유목민족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거대한 장벽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이 강대한 요로를 돌파해 장성을 넘기만 하면 중원과 장장 이남의 강산을 어쩔 도리 없이 내줘야만 했다. 그래서 장성은 전국시대부터 명나라 때까지 계속 축조됐다. 건축 시간의 길이와 공정의 거대함은 지구상에서 첫손가락에 꼽힌다.

 

 

 

 

다시 말하지만 장성의 용도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범을 막는데 있었다. 당시 유목민족은 고정적인 거처가 없었다. 중원 왕조와 비교하면 생산력이 상당히 낮은 단계에 있었다. 어떤 부족은 늘 외족을 약탈하고 침범했으니 중원의 농업 생산과 사회 안정에 거대한 위협이 됐다. 고대의 전쟁은 주로 기병과 보병에 의존하고 있던 상태라 크고 높은 성벽은 안전한 방어막이 돼 주었다. 군대가 주둔하며 막기만 하면 쉽게 넘을 수 없었다. 장성의 건축은 둔전(屯田)을 개발하고 보호하는데도 유리했기 때문에 변방 지역의 생산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통신과 상업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 문서의 전달이나 사절, 상단의 왕래에도 편리했다.

 

전국시대 칠웅의 하나였던 북방의 강국 연(燕)나라는 역수(易水) 장성을 건설했다. 연나라 남부의 변방지역에 위치한다. 지금 하북(河北) 역(易)현 서남지역이다. 동으로 문안(文安)현까지 500여 리에 달한다. 이 장성을 쌓은 이유는 북쪽에 이웃하고 있던 동호(東胡) 산융(山戎)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였다.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인질로 동호로 보내 안정을 추구한 적이 있었다. 동호인들은 진개를 믿었으나 진개가 연나라로 돌아간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쳐 천 리 밖으로 쫓아냈다. 이후 연나라는 동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쪽에 장성을 건설했다. 나중에 진시황이 6국의 장성들을 하나로 이어 이른바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도 더 북쪽에 있었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진시황은 몽념(蒙恬)과 30만 대군을 보내 북쪽의 흉노를 정벌했다. 몽념이 흉노를 내쫓은 후 황하, 음산(陰山)을 따라 정장(亭鄣) 요새를 세웠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조나라 연나라의 옛 장성들을 이었으며 서쪽은 진 소왕(昭王)의 옛 장성을 이용해 연결시켰다. 서쪽은 임조(臨洮, 현 감숙[甘肅]성 남부 조하[洮河]부근)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 이전까지 만여 리가 됐다.

 

원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흉노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장(保障) 북부 12군을 개척하고 중원지역 경제와 문화를 보호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인력 동원이 너무 심했다. 당시 전국의 인구는 약 2000만 명이었고 남자 노동력은 500만 정도였다. 진시황릉과 아방궁 건축에 150만 명, 장성 건축에 약 50만 명, 기타 잡역에 300만 명이 동원됐다. 전국 남자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살길이 없던 백성들은 봉기한다. 이것이 진나라가 중국 역사상 요절한 왕조 중의 하나가 된 이유다.

 

진시황이 장성을 건축할 때 민간에는 『장성가』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사내아이 낳거들랑 조심해 기르지 마라. 계집아이라면 고기를 먹여 길러라. 보지 않았는가, 장성 아래 징용돼 죽은 남자들의 해골이 겹겹이 서로 떠받치고 있음을.(生男愼勿擧,生女哺用脯.不見長城下,尸骸相支拄.)” 이 시는 진시황이 장성을 쌓을 때 노동에 동원됐던 백성들이 당한 재난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장성은 명대(明代)에 건축한 것이다. 진나라 장성은 풍사가 기승을 부리는 황야에 버려져 있다. 진나라 장성의 원래 면목을 알 길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 임조(臨洮) 북쪽 진나라 장성 유적을 보면 당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최하층은 생흙이고 그 위에 견실한 황토를 쌓았으며 황토 위에는 달구질한 흙으로 층층이 성벽을 쌓았고 다진 흙의 층은 황색점토에 깨진 돌을 박았다. 이러한 2000여 년 전의 축성 방법으로 인류 건축사에 남을 기적을 이뤘다고 평가를 하지만, 동원된 백성들의 고충은?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 아니었을까?

 

한(漢)나라에 와서는 북방 흉노가 자주 침략을 해오자 문제(文帝), 경제(景帝) 때부터 계속해서 진나라 장성을 보수했다. 한 무제(武帝) 때 국력이 강성해지자 기원전 121년 곽거병(霍去病)을 파견해 흉노를 치자 흉노의 곤야(昆邪)왕이 4만 명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무제는 황하 서쪽 지역에 무위(武威), 감천(甘泉) 두 군(郡)을 설치하고 외장성(하서[河西]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10년이 되기도 전에 2000여 리의 하서장성을 완공한다. 진나라 장성과 연결하면 돈황(敦煌)에서부터 요동이전까지 1만 1천 500여 리에 이른다.

 

한 무제는 장성의 배치를 고쳐 일정한 거리에 험요 지형을 선택한 후 열성(列城), 성장(城障)을 세우고 봉화로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무제 이후 소제(昭帝), 선제(宣帝) 때도 계속 장성을 쌓고 둔병을 둬 개간하도록 했다. 결국 2만여 리 길이에 성보(城堡)가 서로 연결됐고 봉화로 연락할 수 있는 장성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장성을 축조하는 동시에 한 왕조는 대대적으로 둔전(屯田) 정책을 추진해 백성들을 장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리 공정을 함으로써 서부 변방이 신속히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중에 실크로드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게 됐다.

 

남북조(南北朝)에서 원(元)대 까지 중간에 여러 왕조가 장성을 축조했지만 규모는 진한시대에 미치지 못한다. 명(明)왕조 20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장성을 축조해 장성의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데 총력을 기우렸다. 주원장(朱元璋)이 개국해 국호를 정한 첫해(1368)에 대장군 서달수(徐達修)를 파견해 북경 북쪽 거용관(居庸關) 등의 장성을 축조했다. 홍무(洪武) 10년(1381)에 또 산해관(山海關) 등의 장성을 건축했다. 이후 대규모로 장성을 축조한 것은 18차에 이르고 홍치(弘治) 13년(1500)에 기본적으로 완공되는데 길이가 1만 2천 7백여 리에 달했다.

 

 

 

 

명나라 장성은 요충지, 특히 거용관, 산해관, 안문관(雁門關) 일대에 여러 겹의 성벽을 축조했다. 많게는 20여 겹에 달한다. 장성 남북에 많은 성보(城堡)와 봉화대를 설치해 적의 동향을 살피게 하고 경보를 빨리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장성은 명 왕조에 어떤 의미였을까? 명 왕조 개국 후 원래의 통치자인 몽골 귀족들이 몽골로 철수한 후에도 끊임없이 침략했고 동북지방에 여진(女眞)족이 발흥했기 때문에 명 왕조로써는 북방 방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주원장이 천하를 얻고 나서 주승(朱升)의 “장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늘리며 왕의 수를 완화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각지에 성을 축조하는데 힘을 기우렸다. 전국 각지의 성벽은 모두 벽돌로 쌓아 공고하게 만들었다.

 

장성의 축조는 지형을 이용했고 현지에서 재료를 구했다. 산이 있는 곳은 험준한 산허리를 이용해 바깥은 가파르게 하고 안쪽은 완만하게 했다. 돌을 캐내 일정한 크기로 만든 후 축조했고 안에는 회토와 회석으로 메꿔 견실하게 만들었다. 황토지대는 흙을 다져 만들었다. 사막지대는 갈대와 고리버들을 층층이 깔고 모래알을 넣어 쌓았다. 옥문관(玉門關) 일대의 한나라 장성이 한 예로, 현존하는 성벽을 보면 모래알이 눌러져 있어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모래알과 갈대가 촘촘히 부착돼 있어 상당히 견고했다. 망루의 계단은 몇 겹의 섬유로 쌓아 만들었다. 명나라의 장성 중 중요한 지역에는 구운 벽돌을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명나라 장성을 다녀와서 ‘호한(好漢)’이 됐지만 명나라 장성의 건축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명나라 장성의 건축과 군사 방어체계는 맞물려 있다. 예를 들어 명대에는 장성 주변에 ‘진(鎭)’이라 불리는 군사 관리구가 설치돼 있었다. 총병(總兵)과 진수(鎭守)가 본진이 맡은 장성 주변의 병마를 지휘했다.

 

어떤 진에는 ‘노(路)’가 설치돼 중요한 지역을 방어하는데 지휘관을 ‘수비(守備)’라 했다. 예를 들어 산해관 ‘路’는 산해관 성 안을 수비하고 부근 10여 곳의 요충지를 관장했다. 요새는 장성 선상의 주요 거점으로 일반적으로 험준한 지역에 설치돼 있다. 양쪽 산 가운데 좁은 통로를 ‘애구(隘口)’라 하고 그 애구에 통로를 막아 넘어 올 수 없도록 만든 성을 ‘관애(關隘)’라 한다. 요충지에는 수비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그다음 중요지대는 천총(千總)을 설치해 방어케 했다. 장성을 따라 성(城), 보(堡), 장(障) 등의 방어용 건축물을 세웠다.

 

‘성(城)’은 장성과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 방어형 성곽으로 지방에 분포돼 있는 성과는 달리 면적이 크지 않고 거리가 몇 십 리 등 차이가 있다. ‘장(障)’은 성보다는 작은 소성으로 병사들이 주둔하고 백성들도 살았다. ‘보(堡)’는 수비군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백총(百總)’ 등을 설치해 수비했으며 병사들은 몇 십 명에서 몇 백 명 등 차이가 있었다.

 

어떤 보에는 봉화대가 있었다. 장성 양쪽에는 봉화대(연돈[烟墩] 혹은 돈대[墩臺]라고도 한다)를 설치했다. 장성 양쪽에 가깝게 설치돼 있는 것도 있고 장성 이외의 먼 곳으로 뻗어 있는 것도 있다. 대에는 소수의 수비군이 주둔하고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연락했다. 봉화대는 독립된 높은 누각으로 대 위에는 망루와 연기를 피울 수 있는 시설이 설치돼 있었다. 대 아래는 병사들이 머물던 집과 마구간, 창고와 같은 건물이 있었다. 대략 10리마다 봉화대가 설치돼 있었다.

 

한나라 때 봉화대에는 높은 대를 설치하고 마른 풀을 담은 바구니를 메달아 야간에는 불을 놓았다. 이를 ‘봉(烽)’이라 불렀다. 대 위에는 많은 땔감과 풀을 쌓아뒀다가 낮에 불을 붙였는데 이를 ‘수(燧)’라 했다. 당나라 때는 대 위에 횃불을 배치했다. 각 25보 거리에 매 대마다 흙으로 만든 높이가 1장 5척이 되는 4개의 통(노통[爐筒])을 세워두었다. 불을 붙일 때 통마다 한 명씩 맡아 열고 닫았는데 이를 일거(一炬)라 했다. 적병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불을 붙였다. 1000명을 넘지 않으면 2번, 3000명 이상일 때는 3번, 10000명 이상일 때는 4번을 붙였다. 명나라 때는 다시 바꿨는데 봉화를 보내는 것 이외에 유황, 초석을 이용해 연소를 도왔다.

 

 

 

 

장성의 성벽은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결정했다. 지세가 험준하면 조금 낮게 하고 지세가 완만하면 높게 했다. 성벽 안에 원형의 아치형 문을 설치했고 문 안에는 벽돌 계단을 설치해 성벽 꼭대기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성벽 꼭대기 바깥에는 벽돌로 쌓아 성가퀴를 만들었는데 치첩(雉堞)이라 불렀다. 위에는 조망도 하고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일정한 거리의 성벽 위에는 성벽 밖으로 돌출된 대를 설치했는데 ‘장대(墻帶)’라 불렀다. 장대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초를 서는 곳으로 안에는 병사들이 머물고 무기를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런 장대는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발명한 것이다.

 

이런 거대한 공정은 천문학적 수의 인력과 물력이 동원돼야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의 왕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생산과 안전을 지키기가 그처럼 어려웠다. 장성을 축조하는 노동력은 어디서 충당했을까? 역사 기록에 근거하면 장성을 축조하는 주요 노동력은 수비군대, 그 다음은 강제로 동원된 백성, 셋째는 변방으로 유배된 죄인들이었다. 진한(秦漢)시대에 ‘성단(城旦)’이란 형벌이 있었는데 바로 장성을 축조하는데 동원된 죄인들이다. 낮에는 순찰을 돌며 수비하고 밤에는 장성을 축조하는데 동원 됐으니 그 힘듦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형벌 기간은 보통 4년이었다.

 

명나라 시기 장성을 축조할 때는 시공과 운수의 기계 없이 주로 인력으로 운반했다. 큰 돌 하나가 2000여 근이나 되고 벽돌 한 개도 몇 십 근이나 나갔다. 벽돌은 모래알이 포함돼 있어 무척 단단했다. 운반 방법은 길게 줄을 서서 전달하는 방식이 주였다. 자그마한 손수레를 이용한다거나 굴리는 통나무, 지레, 캡스턴 등 간단한 도구도 동원됐다.

 

어떤 때는 가축들이 인력을 대신하기도 했다. 팔달령(八達嶺) 장성 축조에 당나귀를 이용해 석회 광주리를 나르게 했으며 산양의 뿔에 벽돌을 묶어 산위로 오르게 해 인력 운수를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예는 극소수로 장성을 완성시키는 데는 결국 ‘인력’이 동원됐다.

 

만리장성은 중국 선조들의 지혜와 피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리장성을 오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라고 했던가? 가보면 알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 속에 어리석음이 존재하고 있고 한 부류의 영광을 위한 만인의 애절함이 섞여 있다는 것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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