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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유비(劉備 : 161-223), 자는 현덕(玄德), 탁군(涿郡, 현 하북[河北]) 사람이다. 동한(東漢) 황족의 먼 후예라 한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건립자로 촉한 소열제(昭烈帝)라 부른다. 어릴 적에 빈한했고 나중에 군에 입대해 황건 봉기군 진압에 참여했다. 제갈량(諸葛亮)의 계략 아래 손권(孫權)과 연합해 적벽에서 조조(曹操)를 대패시키고 형주(荊州), 익주(益州), 한중(漢中)을 차지했다. 221년 칭제(稱帝)하고 수도를 성도(城都)에 뒀다. 이듬해 오촉(吳蜀) 전쟁에서 패배하고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자고이래로 모든 제왕은 강산 사직을 개인 재산으로 삼아 자손에게 물려주고 다른 사람이 넘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개국 군주라면 수십 년 동안 피 흘리며 정복 전쟁에 나아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어렵사리 황제의 보좌에 앉았으니 황위를 만세에 계승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했다. 어찌 강산을 남의 손에 넘겨주기를 바랐겠는가? 그러나 유독 유비(劉備)만은 어렵게 얻은 강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를 원했던 듯 보인다. 다른 사람이란 누구인가? 촉(蜀)나라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 181-234)이 바로 그다.

 

 

 

 

유비는 오나라 정벌에서 실패하고 백제성(白帝城)에서 병들어 일어나지 못한다. 임종 시 태자 유선(劉禪)을 제갈량에게 맡기면서 “아들이 보좌할만하면 보좌하고 자질이 없다면 그대 자신이 오르시오”라고 말했다. 제갈량은 그 말을 듣고 유비의 믿음에 감동하면서도 황공(惶恐)하여 고개를 조아리고 울면서 “신은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힘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로 죽을 때까지 지키겠나이다”라고 했다. 한 명은 강산 사직을 부탁하는 것을 넘어 강산 사직을 양위하겠다고 하고 한 명은 어리석은 자신을 알아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후주(後主)를 성심껏 보좌하여 조심하며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비가 얘기한 ‘자신이 오르라’는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떠보기 위한 말일까? 황제가 돼 이러한 도량을 갖추고 양위를 얘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비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한다.

 

역대 황제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황위를 흔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무릇 태자가 황위를 잇는 것에 위협이 되는 세력이 있으면 철저하게 제거했다. 반대 세력을 없애지 못하면 황제는 임종 시 숨조차 거둘 수 없었으니.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과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천하를 얻은 후 거의 모든 공신을 살육했다. 지난 날 혁혁한 공을 세운 책사와 노장들은 대부분 주살됐다. 이런 피의 참극이 벌어지는 원인은 개국 원로들이 나중에 태자의 황위를 위협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태자가 어리면 황제는 임종 시 어쩔 수 없이 친신(親信)대신을 임명하거나 친왕으로 정치를 돕도록 했다. 이런 대신이나 친왕을 임명하는 것도 부득이한 상황에서나 이루어졌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황제는 태자를 보좌하는 대신을 한 명만 임명하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믿을 수 있는 신하 여럿을 세웠다. 그래야 서로 견제하여 한 사람이 대권을 농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순치(順治) 황제가 강희(康熙)를 위해 지정한 보정(輔政)대신은 소니(索尼, Suǒní), 수커사하(苏克薩哈, Sūkèsàhā), 에빌룬(遏必隆, Èbìlóng), 오보이(鰲拜, Áobài) 4명이었다. 함풍(咸豊) 황제가 동치(同治)를 보좌하도록 임명한 대신은 8명에 달했다.

 

유비가 탁고(託孤, 고아의 장래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함)하기 위해 준비한 보정대신은 제갈량 한 명 뿐이었을까? 아니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도 보정대신으로 지정됐다. 이엄은 유장(劉璋)의 부하였는데 유비가 촉으로 들어 올 때 군사들을 이끌고 귀순 한 인물로 제갈량과는 어떤 연원 관계도 없었다. 이엄과 제갈량을 공동으로 보정하게 한 것은 익주 출신과 영주 인사들 사이에 형평을 고려한 것 이외에 서로 견제시킬 용의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비가 임종 시 한 유촉(遺囑)은 진심이 아닐 수 있다고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유비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알았다. 그에 대한 바람이 그리 크지 않았다. 유선은 평범한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큰 희망을 품지 않았고 다만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옳은 일에 매진하기만을 바랐다고 한다. 맞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 아들이 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에게 재능이 없다 싶으면 스스로 황위에 오르라고 했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비는 정말 제갈량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을까?

 

여기에 유비의 빼어남이 있다. 유비는 도의로 말하면 제갈량은 절대 조비(曹丕)처럼 찬위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선한 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비가 임종 시 탁고한 것은 제갈량을 이용하려는 심계이면서 술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태자의 황위를 확보하기 위한 고심의 발로다.

 

그러나 유비와 제갈량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비교적 친밀하고 조화로운 군신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유비는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고 여겼다. 임종할 때 태자를 제갈량에게 부탁한 것은 태자로 하여금 제갈량을 부모처럼 모시라는 의미였다. 이는 중국 역대 군신 관계 중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군신 관계가 친밀하고 조화롭다고 하더라도 강산 사직을 양위할 정도까지야 됐을까? 역시 생각해볼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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