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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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무제(武帝 : 기원전 156-87), 유철(劉徹), 서한(西漢) 황제다. 경제(景帝)의 아들로 기원전 140년에 즉위했다. 재위기간 중에 동중서(董仲舒)와 상홍양(桑弘羊)의 보좌를 받아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면서 거상(巨商)을 누르고 농상(農桑)을 진작시켰으며 수리 공사를 하는 동시에 장건(張騫)을 서역(西域)으로 출사케 하여 국가를 흥성하게 했다. 말년에 선도(仙道)에 빠져 신에게 제사지내고 신선이 되기를 갈망했고 노역이 많아지면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중국역사에서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를 한데 섞어 논하기를 좋아한다. 중국 봉건 전제주의 중앙집권제 국가는 진시황이 건립했고 한 무제가 공고히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황제라 추앙받고 있는 무제는 일생동안 황당한 ‘무고(巫蠱)’ 사건을 계속해서 벌였다. 황후, 태자, 승상과 수많은 대신들이 무고의 희생양이 됐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무고지란(巫蠱之亂)’이다.
무고(巫蠱)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는 흑주술(黑呪術, black magic)의 일종으로 저주(詛呪)하는 것이다. 무고의 방법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고(蠱)’를 가지고 질병이나 재앙을 일으키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이를 유괴해 굶겨죽이고 그 혼령을 이용해 사람들을 해치고 재물을 갈취하는 염매(魘魅)가 그런 것으로 아이의 혼령이 고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흉측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사람이나 짐승의 시신 또는 뼈를 베개 속에 넣어둔다든지 왕래하는 길에 뿌려둔다든지 하는 것이다. 흉측한 물건으로 고(蠱)를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해치려는 사람의 대용물, 예컨대 인형이나 명패 같은 것에 해코지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유사한 행위를 하면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공감주술(homeopathic magic)에 입각한 저주라 할 수 있다. 넷째, 저주의 말을 퍼붓거나 주문을 외거나 부적을 사용해 재앙을 주는 방법이다.
‘고(蠱)’란 글자는 중국 최초의 글자라는 갑골문에 이미 나타나 있어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저주’는 증오와 질투를 실력이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취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고는 사회적 강자인 남성보다 여성들이 선호했다. 무고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그 효력을 믿었던 고대에는 범죄로 간주했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무고를 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돼 있었다. 무고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불법적이고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은밀히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고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는 것은 누군가의 고발에 의한 것이다. 무고 문제를 고려할 때는 누가 무고했느냐에 못지않게 누가 고발했느냐는 점과 고발한 의도가 중요하다. 고발은 허위일 수 있으며, 누군가가 무고했다고 고발함으로써 오히려 무고 당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고’는 고대의 방술(方術)의 하나다. 이런 은밀한 수단을 사용해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무제는 평생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가 중년에 아들을 얻고 만년에 병이 많아지자 죽음을 지극히 두려워하게 됐다. 이후 신의 가호를 비는 미신 활동으로 일생을 점철하게 된다.
첫 번째는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 진황후(陳皇后) 무고 사건이다. 한 무제는 원래 교동왕(膠東王)이었다. 태자는 임강왕(臨江王) 유영(劉榮)이었다. 경제(景帝)의 누나 장공주(長公主)는 자기의 딸인 진아교(陳阿嬌)를 태자에게 줘 비(妃)가 되게 하려 했으나 태자의 모친 율희(栗姬)의 반대에 막혔다. 이에 장공주는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 경제에게 이간질하는 말을 올려 원래 있던 태자를 폐하고 교동왕을 태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무제의 첫째 부인은 고종사촌 여동생 진아교가 됐고 황제에 즉위하자 진황후로 봉해졌다.
무제와 진아교의 혼인은 실질적인 정치적 거래였다. 이런 정치적 거래는 진황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전횡을 일삼고 방자하게 날뛰게 만들었다. 무제의 행동에도 제약을 가해 혼인 후 10여 년이 됐어도 자식이 없었다. 다른 빈비(嬪妃)들도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무제는 걱정에 싸였다. 조정 문무 대신들도 계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평양후(平陽侯)는 무제가 아들을 얻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이용했다.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양가규수들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몸단장을 시켜고 무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무제는 그런 여자들에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반면 평양후의 집에 있는 가녀(歌女)인 위자부(衛子夫)에게 마음을 뺏겼다. 위자부도 무제의 깊은 정을 무시할 수 없어 무제와 동침했다. 마침내 무제에게 아들 유거(劉據), 즉 위(衛)태자를 낳아준다. 이때부터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진황후의 질투가 시작된다.
진황후는 여러 번 사네 못 사네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을 떨면서 무제를 위협했다. 무제는 단호하게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진황후에 대해 더더욱 냉담하게 대했다. 진아교는 자신의 황후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무당 초복(楚服) 등을 불러 ‘무고(巫蠱)’를 벌이고 무제를 저주한다. 무제에 의해 발각된 후 무당 초복은 효수에 처해지고 이와 관련돼 주살된 인원이 300여 명이나 됐다. 진황후도 연금됐다.
두 번째 무고 사건은 정화(征和) 원년(기원전 92)에 발생한다.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 위자부는 위태자를 낳고 황후에 올랐다. 천하의 황후 자리에 앉아있던 30여 년 동안 위 씨 집안에서 5명이나 선후로 후(侯)에 봉해졌다. 명성이 자자한 대사마 대장군 위청(衛靑)은 황후의 동생이요 대사마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은 황후의 조카였다. 황후의 형부인 공손하(公孫賀)도 승상에 올랐다. 이렇듯 위 씨 가문의 세력은 전성기를 구가하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기원전 92년 경사대협 주안세(朱安世)가 도성을 교란시키자 무제는 그를 추포하라 명령을 내렸다. 당시 공손하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은 태부(太仆)의 직위에 있었다. 황후의 생질이라는 신분을 믿고 교만을 떨다 군대의 급료와 보급품을 가로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공손하는 주안세를 체포해 아들이 속죄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주안세는 곧바로 체포 됐고.
주안세가 감옥에서 사건의 전후를 알게 된 후 공손경성과 무제의 딸인 양석(陽石)공주가 사통해 무고로 무제를 저주했다고 상소를 올렸다. 무제는 대노해 공손하 부자를 감옥에 갇혀 죽게 하고 멸문시켰다. 그리고 무제의 딸 제읍(諸邑)공주와 양석공주, 그리고 위황후의 조카들 모두 연루돼 주살됐다.
이런 무고 사건은 무제를 더더욱 의심이 많은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무고의 방법으로 그를 암살하려 한다고 굳게 믿게 돼 버렸다. 이런 심리를 교묘히 이용했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강충(江充)이다.
강충은 원래 조(趙)나라 한단(邯鄲) 사람으로 조태자를 참언으로 죽게 하고 한나라 조정에 들어온 후 알자(謁者)라는 신분으로 흉노의 땅으로 출사하게 되고, 돌아와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가 됐다. 직지수의사자란 수의직지어사(繡衣直指禦史)라고도 부르는데 서한 왕조의 관직인 어사의 일종으로 비단 의복을 입은 존중받은 총신이라는 뜻이다. 직지수의어사는 황제의 특명을 받아 파견되는 어사의 임무를 띠고 출행할 때는 비단 옷을 입었다. 그의 권한은 군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상벌을 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지방 관리를 임의대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강충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한번은 위태자 마부가 황제만 다닐 수 있는 치도(馳道)에서 말 타고 가다가 왕충에게 발견된 후 벌을 받게 됐다. 위태자가 여러 번 용서를 구했으나 강충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둘 사이에 원한이 생기게 됐다. 그런데 무제는 강충의 공평무사하게 업무를 추진한다고 믿어 승진시켰다.
공손하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제는 중병을 얻었다. 강충은 무제가 쓰러지면 위태자가 즉위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태자에게 주살될 것이 걱정됐다. 선수를 치기로 했다. 무제의 중병은 무고(巫蠱)에 의한 것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무제는 강충에게 무고 사건을 맡아 조사하라고 명했다. 강충은 기회를 잡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면서 자백을 강요함으로써 사람들끼리 무고(誣告)하게 만들었다. 이 무고에 관련돼 죽은 자가 수 만 명이나 됐다.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강충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제의 황궁이 고기(蠱氣)에 휩싸여 있다고 상소를 하자 무제는 자신의 어좌(御座)를 파보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황궁을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태자궁을 파보니 저주에 사용했던 동목(桐木) 인형이 나왔다. 이것은 강충이 미리 호무(胡巫)에게 묻어두라고 한 것이었다. 당시 무제는 더위를 피해 감천궁(甘泉宮)에 머무르고 있었던 터라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태자는 무제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모친인 위황후와 상의한 뒤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 7월, 황제의 조서를 허위로 꾸민 후 군대를 동원해 강충을 참살하고 호무를 불태워 죽였다.
태자는 큰 화가 이를 것을 알고 병마를 동원해 자신을 지키려 했다. 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승상 유굴리(劉屈氂)에게 군사를 동원해 난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태자와 황제의 군사는 장안성에서 시가전을 벌려 5일 밤낮을 싸웠다. 쌍방 간에 수 만 명이 죽어 피가 강을 이룰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태자 측 군사가 불리해지자 태자는 도망쳤다가 장안 동쪽에서 대들보에 목매 자살한다.
역사에서는 ‘무고지화(巫蠱之禍)’라고 칭하는 이 변란은 무제 부자 사이의 골육상잔이었다. 결과적으로 위황후는 자살하고 우태자 유거, 태자비 사양제(史良娣), 황손 유진(劉進)과 그의 비 왕부인(王夫人), 그리고 기타 황손, 황손녀 모두 재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심지어 막 태어나 수개월밖에 되지 않은 증손자(유일하게 죽음을 피한 무제의 증손자는 뒷날 선제[宣帝]가 된다)도 감옥에 갇힌다.
이 무고지화 참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죽은 자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후손이 갑자기 비게 돼 버린 것이다. 궁에 안주인이 없어졌고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면서 한 왕조에 위기를 불러왔다. 한 무제 시기의 3차 무고 사건으로 두 명의 태후가 죽었고 2명의 승상이 요참(腰斬)을 당했으며 태자 유거(劉據)와 2명의 공주, 황손이 죽임을 당했다.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10만 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제는 만년에 무고의 술법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태자도 무고에 의해 해를 당한 것일 뿐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도 한다. 결국은 모든 것이 강충의 술수에 놀아난 것을 알게 돼 강충의 3족을 멸하게 하고 다시 자사궁(子思宮)을 세워 태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태자가 죽은 곳에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도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 올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눈물을 뿌렸다고 하고. 어땠을까? 자기 손으로 자신의 3족을 거의 몰살시켰으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