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曹植 : 192-232), 자는 자건(子建), 초(譙, 현 안휘성 박[亳]현) 사람이다. 재능이 넘쳐났고 시문에 뛰어나 아버지 조조(曹操)의 사랑을 받았다. 진왕(陳王)에 봉해졌다. 조조가 죽은 후 형 조비(曹丕)의 질투에 의해 뜻을 펴지 못했다.
진사왕(陳思王)이라고도 불린다. 위의 무제 조(操)의 아들이며 문제 비(丕)의 아우로 그들 셋을 삼조(三曹)라 한다.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중심적 인물들로 ‘문학사상의 주공(周公)·공자(孔子)’라 칭송받았다. 맏형과 태자 계승문제로 암투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나라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정치적으로 평생 불우하게 지냈다.
그의 재주와 인품을 싫어한 형 문제(文帝)는 거의 해마다 그를 새 봉지(封地)로 옮겨가 살도록 강요했다. 그는 엄격한 감시 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 마지막 봉지인 진(陳)에서 죽었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형 문제가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자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煮豆燃豆萁,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라 읊었다. 자기를 콩에, 형을 콩대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이 시가 바로 『칠보지시(七步之詩)』다.
그는 공융(孔融), 진림(陳琳) 등 건안칠자(建安七子)들과 사귀어 당시 문학의 중심이 됐고 오언시를 서정시로 완성시켜 문학사상 큰 영향을 끼쳤다. 위진(魏晉)을 거쳐 당나라의 두보(杜甫)가 나오기까지 그는 시인의 이상상(理想像)이기도 했다.
시문이 성행한 위진 시대에 조식은 탁월한 재능과 아름다운 문필로 이름을 남겼다. 223년 슬프고도 구성진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다. 작가와 낙수 여신이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사람과 신은 서로 달라 가까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다. 현실과 이상의 심한 괴리에서 오는 실망과 고뇌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낙수 여신은 멀리서 바라보면 “나풀나풀 걸어갈 때면 놀란 기러기요, 유순함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듯하네”, 가까이서 보면 “고운 눈을 살짝 흘기면 귀티 나는 보조개가 입가에 피어나네”, 행동을 할 때면 “물결을 밟아 사뿐히 걸으니 버선 끝에 먼지가 이는 듯”했다. 보는 사람은 “뜻이 그 맑은 아름다움에 취해 마음이 흔들리나 기쁘지는 않았다.” 사람과 신은 영원히 떨어져 있는 것이라 서로 통할 수 없다. 경모하는 마음, 천고의 시름, 그리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중국 역대 문장 중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최고 절창이라 칭송받는다.
300년 후 양(梁) 소명태자 소통(蕭通)이 『문선』을 편찬할 때 이 작품을 ‘정(情)’을 표현한 것으로 분류했다. 당나라 이선(李善)은 『문선』에 주를 달았다. 조식의 부는 그의 형수, 즉 문제 조비의 견비(甄妃)를 위해 지었다고 했다. 부의 원래 이름은 『감견부(感甄賦)』였는데 나중에 문제의 아들 명제(明帝)가 보고는 『낙신부』로 바꿨다고 했다. 이 부 속의 ‘낙신’을 둘러싸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무슨 말인가? 이야기는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시작된다. 조조와 원소(袁紹)는 중원의 대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결국 조조가 승리를 거뒀다. 원소의 두 아들의 분열을 틈타 수도 업성(鄴城)을 뺏는데 성공하고. 그때 원소의 며느리였던 하북의 미인 ‘견복(甄宓)’을 사로잡았다. 조비보다 5살이나 많았던 견복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인들 중 초선(貂嬋) 다음 가는 미색이었다.
이 견복을 조조, 조비, 조식이 모두 사랑했다는 게 발단이 된다. 여자 문제로 아들과 다툴 수 없어 조조는 견복을 조비에게 줬고 이에 동생 조식은 몹시 불평하며 침식도 잊고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견복은 신세를 한탄해 자살을 기도했으나 조식은 그럴 때마다 형수를 위로하고 도망치도록 백마를 선사하기도 했다. 견 씨도 조식에게 옥패를 답례로 주고. 조식은 미모의 형수에게 진한 사랑을 느꼈다고.
나중에 황위에 오른 조비는 조식을 포함한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조비가 동생 조식을 괘씸하게 여긴 것은 조식이 자기의 아내 견후를 사랑했다는 것. 의처증이 있던 조비는 아들 조예(曹睿)의 용모를 보고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마침내 조비는 견복을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결을 명하여 죽게 한 후 업성에 매장했다. 즉 미인 견복을 사이에 두고 천하의 영걸들이 사랑을 했다는…….
조식이 자신의 형수를 사랑했다면 형제의 윤리에 위배되고 군신의 의에 맞지 않는다. 불의불충하고 대역부도하니 어찌 품위가 서겠는가? 그래서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진위를 가지고 말과 글로 진상을 논했다. 번다하기는 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이선의 주는 본래 조식이 부를 지은 이유를 기술하지 않았다. 후인들이 『문선』을 판각하면서 그가 말한 것처럼 잘못 인용했다. 둘째, 조식이 그의 형수를 사랑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대담하게 『감견부』를 지을 수 없다. 조비는 어릴 적부터 조식에 대해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긴장 관계에서 조식이 『감견부』를 지었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게 아닌가? 셋째, 형수를 취하려고 했다면 금수와 같은 악행일 텐데 제왕의 동생인 조식이 여론을 생각하지도 않는 방종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넷째, 이선의 주에 문제 조비가 견후가 죽자 견후가 사용하던 베개를 조식에게 하사했다고 했다. 무지렁이도 하지 않을 일을 어찌 황제가 했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다. 다섯째, 『감견부』의 ‘甄’은 견후의 견이 아니라 ‘鄄’ 즉 견성(鄄城)을 가리킨다. ‘甄’과 ‘鄄’은 통한다. 조식은 『낙신부』를 짓기 1년 전에 ‘견성왕(鄄城王)’으로 있었다. 여섯째, 『낙신부』는 복비에 기탁해 문제에게 믿음을 받으려는, 낙식에 대한 앙모는 순수하게 군왕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이 조정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공을 세우고 싶은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조식이 형수인 견복을 사랑해 『낙신부』를 지었다는 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가 이렇듯 많다. 말을 덧붙이면 당시 14살에 불과했던 조식이 아버지 조조에게 24살이나 된 기혼 여자를 처로 달라고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역사적 사실이 어떻든 소설가들과 시인들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낙신’이 바로 ‘견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태평광범』의 「소광(蕭曠)」과 『유서(類書)』의 「전기(傳奇)」에 보면 ‘소광’이라는 미인이 낙신을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낙신은 스스로 “첩은 견후랍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첩이 진사왕(陳思王, 조식)의 재능을 흠모해 문제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혼이 낙수에 이르러 그 원한을 풀어놓으니 감동해 부로 썼습니다”라고 했다고 표현돼 있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조식의 감견의 이야기를 여러 번 인용했고 심지어 “군왕이 천하를 얻지 못한 것은 반은 당시의 낙신부 때문이다”라고 까지 했다. 포송령(葡松齡)의 『요재지이․견후』평에 견후가 조조와 조비를 욕하면서 “조비는 도적인 아비의 변변치 못한 아들일 따름이다”라고 말하여 부자가 한꺼번에 욕먹었다고 표현돼 있다.
문학가들이 『낙신부』의 애절함과 슬퍼 괴로워하는 내용에 감동을 받아 조식의 형수에 대한 사랑을 사실인양 받아들인 것일 뿐으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조식과 견비의 비극적 애정을 동정하고 찬탄한 것일 뿐이다. 윤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던 봉건시대에 동생이 형수를 사랑했다는 것을 정식적인 문장에서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의 범위에서 인륜을 거스른 사건을 얘깃거리로 삼아 인간의 정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문학작품 이외에 조식과 견비의 사랑을 정면으로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곽말약은 『논조식』에서 “자건(조식)이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형수에 대해 애모하는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아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위진 시대 남녀 관계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는 예를 들면서 증명했다. 더 나아가 “자건은 견후를 사모해 견후를 『낙신부』의 모델로 삼은 것은 나는 정리에 맞는 일이라 본다”고도 했다.
그러나 만약에 『낙신부』가 견후를 사랑하는 정을 읊은 작품이라 인정한다면 문장 속 “비록 저승에 있어도 마음은 영원히 군왕께 드린다네(雖潛處於太陰,長寄心於郡王)”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역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군왕’은 부의 ‘予(여)’ 즉 작자인 조식으로 견복이 ‘予’라고 부르는 칭호는 조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본다. 군신지도에 기탁한 것이 아니라 부를 지으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음을 기탁한 것으로 아름다운 환상은 현실이 되기 어려운 슬픔과 원망을 표현했다고 했다. 둘째는 군왕이란 조비가 폐위시킨 동한의 마지막 황제 유협(劉協)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이 추론은 억측이다.
오랫동안 논쟁의 쌍방은 견후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윤리 도덕 혹은 시적 감정을 가지고 추론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낙신부』의 문자의 아름다움과 운치를 충분히 감득해 우리 자신에 맞는 결론을 도출해 봄이 어떨까? 천 년 전 조식이란 인물의 재능도 같이…….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