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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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白起 : ?-기원전 256)는 전국시대 후기 진(秦)나라의 장군이다. 용병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진나라 소왕(昭王)에게 등용되어 13년 좌서장(左庶長)으로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다음 해 좌경(左更)이 되어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연합군을 이궐(伊闕)에서 격파하고 24만 여명을 죽인 다음 국위(國尉)로 승진했다. 15년 대량조(大良造)에 올라 위나라, 조(趙)나라 등과 싸우는 대로 대승을 거두고 한나라와 위나라, 조나라, 초(楚)나라 등의 70여 개 성을 탈취했다. 장평(長平)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둔 다음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을 하룻밤 사이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한다. 50년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공격했다가 실패했는데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던 까닭에 자결하였다.
전국시대에 ‘칠웅(七雄)’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전국 후기 진나라와 조나라 양국은 장평(長平 : 현 산서 고평[高平] 서북)에서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진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이 장평 전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로 기록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두 곳에 기록돼 있다. 하나는 권5 「진본기」로 진나라 소왕 47년(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공격하자 상당은 조나라에 투항하였고 진나라는 그것을 빌미로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도 병사를 동원하여 항전하였는데 쌍방이 오랫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진나라는 나중에 대장 백기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조나라는 장평에서 대패하고 조나라 병사 40만 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다른 한 곳은 권43 「조세가」로 조나라 효성(孝成)왕 7년(진 소왕 47년) 염파(廉頗)를 장군직에서 파직하고 실전에 임해본 적이 없는 조괄(趙括 : ?-기원전 260년)을 앉혔다. 결국 진나라 군대가 조괄을 포위하자 조괄은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였고 그의 수하 병사 40여 만 명 모두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생매장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장평 전투에서 패한 조나라 40만 대군은 생매장 됐거나 피살됐다는 말이 된다.
북송(北宋)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에서 장평 전투에 대해 다름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괄이 친히 정예 부대를 이끌고 진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진나라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조나라 군대는 대패하여 병사 40만 명이 투항하였다. 진나라 장수 백기는 당시 진나라가 상당을 공략했지만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에 투항하려 하지 않고 조나라에 복속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를 죽이지 않고 남겨두면 상당의 백성과 힘을 합쳐 복수할 위험이 크다고 봤다. 그래서 백기는 항복한 40만 명의 조나라 군사를 전부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리고 나이가 적은 240명만 살려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진나라가 이를 전후로 조나라 군사 총 45만 명을 살육하자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 역사상 특출한 역사가인 사마천과 사마광 모두 성실한 학문 태도로 이름이 높다. 그들이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가 조나라 병사 40만 명을 도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그 누가 의심을 품을 수 있었으랴. 현대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곽말약(郭末若)은 『중국사고』에서 장평 전투를 얘기하면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포로가 됐는데 백기는 잔혹하게 그들 모두를 생매장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백찬(翦伯贊)은 『중국사강요』에서 장평대전을 조나라 군대가 장평에서 발이 묶였는데 양식이 떨어져 모두 진나라에 투항하자 진나라 장수 백기는 조나라 병사 40만 명을 장평에 매장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관점은 모두 사마천의 『사기』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송(南宋)시대 경학, 사학, 문학에 두루 밝은 대학자 주희(朱熹)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수업 도중 학생들에게 사마천이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살육 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조나라 군대가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40만 명을 생매장 했다면 얼마나 넒은 땅이 필요할 것인가? 조나라 장병들이 많은 전투를 치렀을 텐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생매장 당할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주희의 의문이었다.
주희가 문제를 제기하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렇기도 하겠다. 40만 명을 생매장시켰다면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했겠는가. 40만 명을 생매장 했다면 시간이 흘러 그 곳을 파면 백골로 인산인해를 이룰 텐데. 발굴이 되면 목불인견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 역대 사서 중에서 장평 일대에서 백골이 발굴됐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40만 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모두 부패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만약 생매장 됐다면 40만이나 되는 병사들은 도대체 어디에 묻혔다는 말인가?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기록된 동주(東周)시기 중원지방 인구에 대해 통계를 낸 후 당시 조나라에는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생매장 당할 인구가 없었다고 하였다. 『통전』을 근거로 하면 장평 대전보다 423년 전 주나라 장왕(莊王) 13년(기원전 684년) 당시 중원의 인구는 1849만여명이었다고 한다. 만약 400여 년 동안 인구가 2배가 증가하였다고 하더라도 3000여 만 명에 불과하다. 전국 제후국 중 진, 초, 제, 연, 한, 조, 위 칠웅 이외에도 송(宋), 위(衛), 중산(中山) 등 많은 소국들이 있었다. 칠웅은 대국으로 총 인구는 전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한 나라의 인구는 200여 만 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평에서 생매장 된 40만 명은 조나라 전체 인구의 1/5이나 된다.
이 40만 명도 조나라 군인의 전체가 될 수 없고 많았다고 하더라도 군대의 절반을 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조나라 군인이 40만 명밖에 없었다면 당시에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사기』에 나중에 진나라와 조나라 전쟁 중 조나라 군사의 수가 9만, 10만 등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수와 조나라 기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사의 숫자를 더하고 장평에서 생매장된 군사 40만 명을 더하면 조나라 군사의 총수는 1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조나라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나라 사람 중 절반이 군인이라는 말인데 납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평 전투에서 생매장됐다는 40만 명이란 숫자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사기』의 기록은 의문이고 후대의 기록인 『통전』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조나라 군사를 조(組)로 나누어 땅을 파게하고 생매장시켰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현재 장평 유적지에서 생매장된 인골들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데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조나라는 온 힘을 다하기 위해 모을 수 있는 병사를 최대한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40만 명을 생매장시켰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있어서는 안 될 대참사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40만 명이란 숫자는 분명 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항복한 병사를, 그것도 중원에 살던 동족을 생매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나라는 장평 전투를 끝으로 다시는 흥기하지 못한 채 30년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