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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묘족(苗族 : 먀오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다. 귀주(貴州), 호남(湖南), 운남(雲南), 사천(四川), 광동(廣東), 호북(湖北)에 주로 분포돼 있다. 언어는 한장어(漢藏語)계 묘기요족(苗期瑤族) 묘어(苗語) 갈래에 속한다. 현재는 한어(漢語)와 한문(漢文)을 쓰는 사람이 많다. 묘족은 가무을 좋아하고 부녀자들은 자수와 납염(臘染)을 잘한다.

 

묘족은 현재 중국 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다. 묘족의 기원을 쫓는다면 『묘족고가』중 「발산섭수(跋山涉水)」의 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전에 오지내(五支奶)는 동방에 살았었네. 이전에 육지조(六支祖)는 동방에 살았었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오지내’와 ‘육지조’는 묘족의 선조다. 전해지는 민요를 따르면 묘족들은 동방과 관계가 있다. 이는 묘족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추론할 수 있는 현존하는 귀한 자료다.

 

『사기․오제본기』에 전설의 황제(黃帝) 시대 때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에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는 탁록의 벌판(현 하북[河北] 탁록현 경내)에서 치우가 이끄는 부족 연합체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이때 치우의 부족 연합체가 바로 근대의 묘족과 요족(瑤族)의 조상으로 추측한다. 묘족들도 자신들이 치우의 후손이라 확신하기도 한다.

 

 

사실 묘족의 조상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다. 고대 양주(梁洲)의 ‘몽족(蒙族)’이 현재 묘족의 조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대 ‘무릉만(武陵蠻)’ 혹은 ‘무계만(武溪蠻)’ 중에서 현재 묘족의 조상이 됐다고 하기도 하며 고대 용국(庸國)의 후예라고 하기도 한다.

 

문헌 기록을 보면 일찍이 『후한서․남만전』에 묘족이란 민족 명칭이 명확하게 기록돼 있다. 묘족 분포 지역을 ‘만이지지(蠻夷之地)’라 불렀고 중국 남방, 귀주(貴州) 경내를 포함하는 소수민족을 ‘남이(南夷)’라 불렀다. 당시의 묘족들은 동정호(洞庭湖)와 원강(沅江) 일대에 거주했다. 완강 상류에 5개의 지류가 있어 역사상 ‘오계(五溪, 현 귀주 동인[銅仁], 송도[松桃]와 귀주 동남부 대부분이 오계 유역에 속한다)’라 했고 묘족을 포함한 현지의 소수민족을 ‘오계만’이라 불렀다.

 

초사(楚辭) 『이소』에 “고양제의 후예다(帝高陽之苗裔兮)”라는 구절이 보인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묘족은 초(楚)나라 조상이라 한다. 그러나 범문란(范文瀾)은 초나라 경내에 묘족, 화족(華族) 및 기타 여러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본다.

 

당시 진나라와 초나라는 중국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초(楚)문화는 장강 유역의 ‘만인(蠻人)’이 창조한 것이다. 회하(淮河) 유역의 ‘이인(夷人)’과 화하(華夏) 제후의 국인(國人), 거주민 사이에 서로 장기간 왕래하면서 교류했다고 한다. 하화 문화와 ‘무(巫)’ 문화가 융합해 이루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 중국학자들의 일반적이 견해다.

 

『묘족고가』중 ‘홍수’, ‘사일(射日)’, ‘탱천(撑天)’ 등이 나오는데 이는 중원 한족 전설 중의 공공씨(共工氏) 이야기, 보천(補天) 고사, 예(羿)의 해를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와 서로 닮았다. 이는 당시 초나라 경내의 묘족 문화 속에 화하 문화가 섞여 있음을 나타낸다.(물론 한족의 문화가 된 화하 문화가 묘족의 문화를 도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시기 묘족의 거주지는 어디일까? 『후한서․남만전』에 진나라 소왕(昭王) 때(기원전 306에서 기원전 251) 백기(白起)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하고 만이(蠻夷)를 쳐서 처음으로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묘족은 현 상서(湘西, 상강[湘江] 서쪽), 검동(黔東, 귀주성 동쪽)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서남(西南)의 광대한 지역에는 미처 이르지 못했다.

 

묘족은 예로부터 끊임없이 이주했다. 묘족의 『고가』속에서 묘족의 기원과 이동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발산섭수」라는 옛 노래는 묘족들이 도류(都柳)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주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들은 대략 송나라 때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본다.(노래에는 보다 나은 생활을 꾸리기 위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나섰다고 돼 있으나 결국 민족 간 갈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전쟁의 살육을 피해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개천벽지가」라는 옛 노래에 하늘의 기둥을 만들어 지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제련기술이 발달한 수공업을 묘사한 장면으로 해석하고 제련기술이 발달한 당나라나 송나라 시기라고 중국학자들은 추론한다.

 

 

언제부터 이주하기 시작했던지 간에 묘족은 중국 역사에 있어 가장 많이, 그리고 대대적으로 이동한 민족이다. 번작하(樊綽夏)의 『만서(蠻書)』에 함통(咸通) 3년(862)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전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묘족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적장(賊將)들이 각각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반호(盤瓠)’나 ‘반고(盤古)’의 후예라 자청했다고 한다. ‘반호’는 치우의 씨족 혹은 부락 중 개를 토템으로 하는 묘족의 조상이다.

 

이 기록 외에 여러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때 현재 운남 경내에 거주하던 묘족들과 한족들의 봉건왕조와 전쟁을 벌였고 전란을 피해 묘족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상서(湘西)와 귀주성 동쪽에서 사천성 동쪽, 사천 동남쪽, 호북성 서남과 운남성 경내에 흩어져 거주했다. 『원사․지리지』를 고찰해 보면 남소(南沼), 대리(大理)시기의 나웅부(羅雄部, 현 나평[羅平]현), 납구부(納垢部, 현 마용[馬龍]현)의 부족 수령들은 스스로 ‘반호’의 후예라고 칭했다.

 

묘족의 대대적인 이동은 봉건왕조 통치자의 중앙정부의 영향이 크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 때 묘족의 거주지에 ‘검중군’을 설치했고 한나라 때에도 ‘무릉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광대한 묘족 부락은 수령인 ‘만추(蠻酋)’, ‘이수(夷帥)’가 통치했다. 7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기간 당나라와 송나라 두 왕조는 현재 귀주의 묘족 거주지에 ‘기미부(羈縻府)’를 설치했으나 토착의 ‘만추’ ‘이수’와 한족의 대성 및 장리가 주관이 돼 봉건 영주 특성을 가진 통치를 하게 되면서 묘족들의 이동은 점차 줄어들게 됐다.

 

묘족들의 이동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할 것이다. 민족들 간 갈등에서 비롯돼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이주하고 분산 거주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중원의 한족들과의 갈등, 원나라의 몽골족들이 대대적인 남천으로 인한 몽골인들과의 갈등, 북방 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는 시기(오호십국시기 등)에 중원에 거주하던 한족들의 대대적인 남천에 따른 갈등, 여진족들의 대대적인 남천과 절대통치에 따른 갈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인에 의해 묘족들은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이주하고 현재 중국의 서부 일원에 흩어져 거주하게 됐다.

 

그중 한 부류가 현재 중국 남쪽 국경을 넘어 동남아시아로 이주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들이 바로 ‘몽족(Hmong people)’이라 보는 것이다.

‘몽족’은 중국 남부, 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북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으로 고대 중국의 중부와 남부 등에서 살던 묘족(苗族)에서 갈라져 나와 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북부, 태국, 미국 등에 흩어져 살게 된 민족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몽족은 11세기까지 왕국을 이루기도 했지만 이후 세력이 약화돼 세계 각지의 소수민족으로 살아오고 있다. 주로 고산에서 화전으로 쌀과 옥수수 등을 재배하거나 소ㆍ돼지ㆍ닭 등의 가축을 기르며 생활한다.

 

 

라오스 고산시대에 살던 몽족은 베트남전쟁 때 미국을 지원했다. 그러나 1975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하고 라오스가 공산화되자 박해를 피해 메콩 강을 건너 태국 등으로 탈출해 고단한 난민생활을 해 왔다. 미국의 경우 1975년 이후 몽족 15만여 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몽족과 묘족이 같은 분파인지는 아직까지도 이론이 많다. 분명한 것은 중국에 여러 지역에 분포한 묘족들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민족 간 갈등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초(楚)문화 혹은 무(巫)문화라 일컬어지는 중국 문화의 한 쪽을 담당했던 묘족들의 대대적인 이동은 민족 간의 갈등에 따른 것으로 인류의 동족 중심의 이기심과 이족들을 살육하는 야만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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