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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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융(孔融 : 153 - 208)은 한나라 말기 문학가이다. 자는 문거(文擧)로 노(魯)나라(산동 곡부[曲阜]) 사람이다. 북해상(北海相), 소부(少府), 중산대부(中山大夫) 직에 있었다. 문채가 비범하고 문장에 재간과 예기(銳氣)를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고 평가받는다.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나중에 조조(曹操)의 분노를 사 죽임을 당한다. 저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산실됐다.
공융은 공자의 제20대 손으로 153년에 태어났다. 북해상을 지냈기 때문에 공북해(孔北海)라 불리기도 한다. 박학다식해 널리 존경받았다고 한다. 공융은 예양(禮讓)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직설적인 언변으로 미움을 사기도 했다. 직설적인 언변과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 때문에 결국 조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공융을 죽인 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융이 북해상에 있을 때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군대를 모집해 유 씨 천하를 빼앗아 스스로 황제라 칭하려고 했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허구다.
둘째, 공융은 ‘외국과 내통’하여 손권(孫權)의 사자에게 ‘조정’을 폄훼했다. 이는 가능성이 있다.
셋째, 공융은 모자를 쓰지 않은 채 궁정을 들어오는 등 조정의 예절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것도 가능성이 있다. 조조에게 불경한 것이다.
넷째, 공융과 예형(禰衡)은 서로 표방했다. 예형은 공융을 “공자가 죽지 않았다” 평가했고 공융도 예형을 “안회(顔回)가 부활했다”고 말했다. 이 또한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섯째, 공융을 ‘불효(不孝)’했다는 괴설이다. 예를 들어 공융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병에 물이 가득 찬 것과 같아서 병 안의 물을 따르는 것처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끝이 난다고 주장했다. 또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기황(饑荒)이 들었을 때 음식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줘야 하는가 주지 말아야 하는가? 공융은 아버지가 옳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이는 공융이라면 할 만한 의론이다. 지금으로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이런 주장들은 당시에는 신선하며 대담한 말이었다. 이는 유가의 효도와는 다른 것이다. 조조 자신도 인재를 선발할 때 불충과 불효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공융은 ‘불효’와 관련될 만한 말만 했고 ‘불효’의 행위를 한 적이 없는데 ‘불효’라는 죄명으로 주살하는 오명을 씌웠을까? 물을 필요도 없기는 하다.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면 무슨 핑계인들 못 댈까.
공융이 피살된 원인에 대해 범엽(范曄)은 『후한서․공융전』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융과 조조 사이에 미움이 생기게 된 것은 조조의 군대가 업성(鄴城)을 함락시킨 후 큰아들 조비(曹丕)가 견(甄) 씨를 맞이하면서 시작됐다. 조조가 원소(袁紹) 부자를 퇴패시킨 후 조비는 원소의 며느리를 자신의 처로 삼았다. 공융은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고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 주의 비였던 달기(妲己)를 무왕의 동생인 주왕(周王)에게 줬다고 했다. 조조가 출처를 묻자 현재의 것으로 옛것을 보기로 삼는데 그때도 그랬을 것이라 했다. 비꼬아 조롱하는 것일 터. 또 조조가 술이 망국의 지름길이라며 술을 마시지 말라는 금주령을 내리자 공융은 여인도 망국의 길인데 어찌 혼인을 금하지 않느냐며 반대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정치 투쟁의 각도에서 그들 사이의 은원을 분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백찬(翦伯贊)은 “조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자신에게 종속하지 않는 사인(士人)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조조는 ‘풍속을 정돈’한다고 표명하고 겉만 화려하고 실속 없이 모임만 갖는 부류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가장 안하무인이었던 명사 공융 등을 죽였다는 것이다. 조조가 대족(大族) 세력을 복종시키고 전제 통치를 완성하려 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곽말약은 『중국사고』에서 “조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아꼈지만 재주를 믿고 제멋대로 하면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사람은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융이 조조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말을 자주 내뱉자 조조는 “대중을 규합하여 법도에 어긋나게 한다”는 죄명을 씌워 죽였다고 봤다. 여관영(余冠英)은 『한위육조시선』에서 공융은 “성정이 강직하고 기탄없이 말을 했다”고 썼다. 조조는 공융이 여러 번 자신을 거스르고 자신을 따르지 않았으며 그의 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반대 세력이 되는 것이 염려돼 살해했다고 보았다.
또 다른 견해는 성격 차이에서 비극이 발생했다고 본다. 공융과 조조는 판이한 성격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공융의 구애받기를 싫어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성격이 목숨을 잃는 재앙을 초래했다 본다. 공융은 원래 관직을 원하지 않았다. 지방 정부가 여러 번 그를 천거했으나 그때마다 고사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어 관직에 오르고서는 신관 친족의 죄악을 폭로하면서 권력자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외척인 하진(何進)에 대한 태도도 강하기 그지없어 하진은 자객을 보내 죽일 생각까지 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독점한 후 공융이 반대 의견을 수차례 제기하자 동탁은 공융을 조정에 남겨 두지 않고 황건(黃巾) 세력이 가장 강했던 북해군으로 파견해 농민봉기를 진압하도록 했다.
당시 최대 군벌이었던 조조와 원소가 서로 전쟁을 벌이자 공융은 두 사람 모두 한 왕조의 찬탈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둘 다 멀리했다. 그는 북해에서 6년간을 머물렀고 유비(劉備)의 추천을 받아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됐으나 얼마 없어 원소의 아들 원담(袁譚)의 공격을 받는다. 봄에서 여름까지 몇 백 명의 전사만 남아 있었다. 적들이 가까이 왔으나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탁자에 앉아 독서하고 태연자약 담소를 나눴다. 성이 함락되고서야 후퇴를 했다.
나중에 조조가 헌제(獻帝)를 데리고 허창(許昌)으로 천도했다. 천자가 공융을 조정으로 부르자 헌제의 곁에서 의견을 제시하면서 한나라 조정을 보위하고 조조의 찬탈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세력이 없었다. 조조에 대해 그저 풍자(諷刺)라는 수단으로 그의 단점을 들추어내면서 그의 위신을 깎아 내렸을 뿐이었다.
공융은 날카로운 말로 조조의 정곡을 찔러 조조의 분노를 샀다. 조조는 자신을 반대하는 부류를 진압하기 위해 고대의 육형(肉刑)을 부활할 것을 주장했다. 공융은 반대했다. 고대의 통치자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과오로 인해 범죄를 저지른 반면 현재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무도를 저지르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었을 뿐으로 고대의 형벌로 백성을 다스린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과 같이 송곳처럼 찔러댔다.
이전에 주왕(紂王)은 새벽에 맨발로 강을 건너면서도 차갑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발을 잘라 무슨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이런 것 때문에 천하는 주왕이 무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 전국 구주(九州)에 1800개 행정 단위가 있는데 매 단위의 장관은 각자가 소황제처럼 행세한다. 만약 매 황제가 백성의 발을 자를 권한을 가지게 된다면 1800명의 주왕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형을 받은 사람들은 신체 불구가 되니 사회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나쁜 길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육형이란 결코 사람들을 악에서 선으로 이끌 수 없다고 했다.
공융의 이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조조가 무도하다는 비꼬는 풍자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조조는 공융이 자신을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번(張璠)은 『한기(漢紀)』에서 “그때 천하가 터를 닦고 있을 때라 조조와 원소의 권력이 나눠져 있지 않았다. 공융이 확실하게 하려 함은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다. 천성이 시원시원하여 평소의 뜻을 내보이면서 태조(조조)를 업신여겼다. ……태조는 겉으로는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불쾌해 했다”라고 평했다. “조류를 파악하지 못한다”거나 “시원시원하다”, “업신여겼다”는 말은 공융의 고지식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을 이르는 것이고 “너그러운 듯하나”, “불쾌해 했다”는 것은 조조의 심리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공융은 더 나아가 조조를 반대하는 사람을 조정에 추천해 조조 반대 세력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재능이 있는 청년 예형을 승상 조조의 손을 거치지 않고 헌제에게 직접 추천했다. 예형이 조정에 들어오자 조조가 모욕을 줬다. 예형도 지지 않고 대중 앞에서 조조를 비판했다. 조조는 예형을 유표(劉表)에게 보냈고 유표는 또 황조(黃祖)에게로 보내 황조의 손을 빌어 예형을 죽이도록 했다.
공융은 일찍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하진, 동탁 모두 그를 싫어했지만 그를 감히 죽이지는 못했다. 조조도 그를 죽이지 않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사회에 공융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조는 그가 여론에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업에 방해되자 마침내 사람을 시켜 공융의 죄상을 고발케 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다.
공융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조조를 냉소하고 비꼬아 풍자하면서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주관적으로는 정치적 적대감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조조 개인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조조의 명령의 준엄함을 깎아내리게 되면서 끝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든 측면이 있다. 공융의 죽음은 정치적 요인 이외에 성격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극적 성격이 강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