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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강태공(姜太公), 생졸 미상, 이름 ‘상(尙)’, 자는 ‘자아(子牙)’다. 곤륜산에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을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고 성취를 이룬 후 주(周)나라 왕실을 도왔다고 하였다. 80세 때 위수(渭水)에서 주나라 문왕(文王)과 서로 뜻이 맞아 재상이 되었고 무왕(武王)이 군대를 일으켜 주(紂)왕을 정벌할 때 동참하면서 주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신비한 행적은 『봉신연의』에 비바람을 부르고 콩을 뿌려 병사들을 만들어 내는 신력을 가진 인물로 기록돼 있다.

 

강태공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고전 신마소설 『봉신연의』에는 박학다식하고 하늘의 뜻을 따라 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강자아를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강자아를 강태공이라 부르며 신으로 존경하였다. 특히 중국에서는 문 앞에 ‘강태공이 여기에 있으니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다[姜太公在此百無禁忌(강태공재차백무금기)]’라고 쓴 붉은 종이를 붙여 귀신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족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그러나 『봉신연의』는 신마소설이다. 황당무계하고 진실성이 없다. 그리고 중국 민간 전설 속의 강태공은 진실인 것도 같고 환상인 것도 같은 미신적 색채가 강한 인물이다. 과연 중국 역사 속에 강태공이란 인물이 실존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강태공을 서주(西周)의 개국공신인 태공망(太公望)이라 한다.

 

태공망, 성은 강(姜)이요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다. 그의 선조는 대우(大禹)를 도와 치수한 공적이 있어 여(呂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부근) 땅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그 일가는 ‘呂’를 씨(氏)로 삼았다. 고대에는 성과 씨는 구별 되었다. ‘성은 혼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혈통을 나타내고 ‘씨는 귀천을 구별하는’ 것으로 신분을 나타낸다. “남자는 씨를 부르고 여자는 성을 부른다”(『통지․씨족략』)이라 한 것처럼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경전, 사적, 자서와 사부에서는 태공망의 존칭으로 ‘氏’를 붙여서 여상(呂尙), 여아(呂牙), 여망(呂望), 여태공(呂太公)이라 부른다. 주의할 것은 선진과 양한의 서적에서는 ‘姓’을 붙여 강상, 강아, 강망, 강태공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실재의 태공망은 어느 지방 사람일까?

 

사서 『여씨춘추․수시』기록에는 그가 ‘동이지사(東夷之士)’라고 하였다. 『사기․제태공세가』에서는 ‘동해상인(東海上人)’이라 돼 있다. 그럼 ‘동이(東夷)’, ‘동해(東海)’는 또 어디를 가리키는가?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에는 중원 이외의 지역을 ‘만이(오랑캐)의 땅[蠻夷之地]’이라고 불렀다. 특히 중원의 동쪽 지역을 ‘동이’라 하였다. 따라서 ‘동이’, ‘동해’는 지금의 동해 지역, 산동 일대를 가리킨다. 아마도 여 씨 자손 중의 한 분파가 동해 해안가로 이주해 가서 동이들과 함께 살다가 점차 명망이 있는 집단을 이룬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보고 있다. 태공망이 대족장의 신분으로 그 가족의 세력을 결집시키면서 우두머리가 됐을 것이라고 하고. 『맹자』에 제후의 아들인 백이(伯夷)와 함께 거론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높았던 신분을 추론할 수 있다.

 

태공망의 이력은 역사서에서조차 의론이 분분하다. 단순히 『사기․제태공세가』의 기록만 봐도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태공만은 원래 동해 바닷가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주 문왕이 현자를 등용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도와 자신의 포부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래 상나라 주왕의 모사였는데 나중에 주왕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제후들을 찾아다녔지만 중용되지 못하다가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주 문왕을 만나서야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책․진책오』에는 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가난 때문에 자포자기의 지경이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였다. 도성인 조가(朝歌 : 현 하남성 기현)에서 고기 장사를 했으나 고기가 썩어 장사를 못했고 극진(棘津 : 현 하남성 연진 동북)에서 낚시를 하였으나 물고기가 낚이지도 않았으며 돗자리를 짜서 시장에 내놨으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설원․잡언』에도 농사를 지었으나 종자 값도 나오지 않았고 고기를 잡았으나 어망 값도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진한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전파돼 있었다. 이런 기록들은 야사의 작가들이 꾸며낸 것으로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천하를 경영할 만한 지혜’를 가진 태공망이 상나라 말기에 오랫동안 뜻을 펴지 못하다가 주 문왕에 귀의하고 나서야 중책을 맡았고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 문왕(文王)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주(周) 부족의 왕이다. 주 부족은 농업 경영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夏) 왕조의 신하의 나라였다. 상(商)나라 후기에 주 문왕의 명군의 지도 아래 힘이 강대해 지고 상나라와 필적할만한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빈번히 충돌하였다. 주 문왕은 동맹국의 지지를 얻고 멀리 있는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끊임없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는 상나라 서쪽 지방의 제후국과 부족들의 맹주가 됐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방의 세력들과 연계해 나갔다. 북해 지역의 백이와 동해지역의 태공망의 세력을 규합했다는 것은 주 문왕의 정책이 성공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역사적 사실도 태공망을 얻음으로써 호랑이 문왕이 날개를 달게 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태공망도 재능을 펼치게 됨으로써 주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 끝내 상을 멸하고 주를 세우게 된 것이다.

 

태공망의 치국에 대한 주장은 “덕을 닦아 정치를 함으로써 내부를 평안하게 하고 기묘한 계책을 펼쳐 상을 도모한다(修德政以安內,施奇計以謀商)”라고 포괄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주나라는 안으로는 덕치를 펼쳐 군민이 한 마음으로 뭉쳐 번영을 추구할 수 있었다. 상나라와 비교하면 소국이었지만 서서히 상나라를 멸할 수 있는 힘을 쌓아가게 된 것이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태공망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다. 심지어 스스로 상나라 중심지에서 간첩 활동까지 하였다.

 

문왕 말년에 상나라를 멸망시킬 조건이 마련되었고 무왕이 즉위하자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적극적으로 상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무왕은 태공망의 계책아래 “무도하고 의롭지 못한 자를 벌한다”는 기치를 들고 민심을 등에 업어 즉위 2년 후 주(紂)왕을 정벌하러 제1차 동진에 나선다. 태공망의 지휘아래 군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넘어 맹진(孟津 : 지금의 하남 맹진 동북)에 도착한다. 진군하면서 800여 제후들과 동맹도 맺는다. 그러나 무왕과 태공망은 천기와 세력을 살펴보고는 아직 상나라를 멸할 수 있는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알고 회군하여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다시 2년이 시나 태공망은 상나라가 ‘악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누르고(讒慝勝良)’, ‘어진사람은 떠나 버리고(賢者出走)’, ‘백성들은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百姓不敢怨誹)’, ‘혼란은 극도에 이르렀고 갈 데까지 다 간 것(其亂至矣,不可以加矣)’[『여씨춘추․귀인』]이라 그 수명이 다했다며 무왕에게 재차 출병을 권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전차 300대, 용감한 무사 3,000명, 갑옷 입은 군사 45,000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주왕을 정벌하였다(遂率戎車三百乘,虎賁三千人,甲士四萬五千人,以東伐紂.)”[『사기․주본기』] 동진이 시작되자 동맹을 맺은 많은 제후와 부족들도 모여들었다. 정벌 과정에서 태공망은 중심이 되었다. 『논형․복서』에 군대를 모은 후 무왕은 卜 (복 : 귀갑[龜甲]으로 길흉을 점치는 것)과 筮(서 : 시초[蓍草]로 길흉을 점치는 것)를 행하였다. 점 친 결과 ‘대흉(大凶)’으로 나왔다. 그러자 태공망은 시초를 던져 버리고 귀갑을 밟아 버리면서 “마른 뼈와 죽은 풀이 어찌 흉을 알겠는가!(枯骨死草,何知而凶)”라고 하며 무왕에게 계속 진군하도록 결연히 독려하였다.

 

2월 갑자 새벽, 주나라와 상나라 군대는 조가(朝歌)에서 70리 떨어진 목야(牧野 :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서남쪽)에서 결전을 벌일 때도 태공망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앞서 나갔다. 상나라 주왕의 대군은 동이(東夷)의 변란을 정벌하고 돌아와 재정비를 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임시로 노예와 전쟁포로를 앞세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무왕이 “용사와 융거를 앞세워 상나라 군진으로 돌진하니 상나라 군대는 붕괴되었다(以虎賁戎車馳商師,商師大崩)”[『일주서․극은』] 상나라 군대의 노예 중심의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무왕에게 투항하였다. 주나라 군대가 상나라의 성도인 조가에 진군하자 주왕은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죽었다. 중국 역사상 새로운 왕조인 서주(西周)가 이로써 탄생한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태공망은 개국공신이 돼 무왕으로부터 ‘제(齊)’ 땅에 봉해지고 성도를 영구(營丘 : 지금의 산동성 치박[淄博]시 임치 북쪽)로 정한다. 봉지 면적은 매우 넓었다. 후에 은나라의 잔여 세력이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옹립하여 변란을 일으키자 주 무왕이 동정을 나섰을 때에도 태공망은 왕실의 제후국으로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함께 평정하였다. 그 전쟁 중에 상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방국과 부족들을 병합하여 제나라의 지역을 넓혔다.

 

봉지를 다스림에 있어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제나라 지역이 바닷가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어업과 염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수공업과 상업을 제창한다. 태공망의 지도아래 제나라의 방직, 자수, 편직, 재봉 등 기술이 발달하였다. 예의 제도를 간화하여 현지 주민의 가지고 있었던 풍속을 존중하기도 했다. 제나라는 급속히 부강하게 되어 “많은 백성들이 제나라에 귀속되어 제나라는 대국이 되었다(人民多歸齊,齊爲大國)”[『제태공세가』] 태공망이 견실한 기초를 닦음으로써 제나라는 서주시기에 국력이 강성하게 된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제나라는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서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된다.

 

강태공의 수명도 미스터리다. 고본 『죽서기년』기록에 따르면 태공망은 주 강왕(康王) 6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순자․군도』에 그가 72세가 돼서야 문왕을 만났다고 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여망이 90이 돼서 문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도 생겨났다. 이런 기록으로 본다면 태공망이 120세에 세상을 떴다는 말이 된다. 당시 인간 수명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목야 전투에서 태공망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고 하였는데 100세가 된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국 이후의 저서에 태공망의 연령을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강태공과 태공망은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말인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태공망이 나이가 들어 인생의 성취를 얻은 것처럼 나이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분투하라[呂望使老者奮(여망사로자분)]는 미담을 남기는 것이라 이해하자.

 

왜냐하면 옛 기록이 완전할 수 없고 또 후대에 가미한 말들은 후대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 있으며 그 자체에 역사 속 중국인들의 사상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대기만성의 한 예로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25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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