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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3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형가(荊軻), 생졸년 미상,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이다. 협사(俠士)다. 독서와 칼 쓰기를 좋아했다.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이 진왕 정(政 : 진시황)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형가의 친구 전광(田光)과 사귀었는데 전광이 그를 추천하여 상경(上卿)으로 추대하였다.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장군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비수를 넣은 연나라 독항(督亢)의 지도를 가지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정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주살되었다. 그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면서 역수(易水)를 건너게 되었을 때 친구 고점리(高漸離)가 치는 축(築)에 맞춰 불렀다는 노래가 「역수가(易水歌)」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부환) 장사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深虎穴兮入蛟宮(심호혈혜입교궁) 호랑이 굴을 더듬어 이무기 궁으로 들어가노라.
仰天噓氣兮成白虹(앙천허기혜성백홍) 하늘을 우러러 기운을 마시니 하얀 무지개가 드리웠도다.

 

친구 고점리의 음악과 역수의 찬바람 속에 형가는 길을 떠났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자약 진나라로 향했다. 그는 왜 태자 단(丹)의 요구에 응해 진나라 왕 정(政)을 죽이러 갔을까? 그의 행동은 무슨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역사 연구가들은 흥미를 느꼈다.

 

 

『사기․자객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형가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 사람이었다. 진(秦)이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연나라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연나라에서 형가는 중용되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한 후 종종 고점리 등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사료의 기록에 형가는 “독서와 격검을 좋아했다[好讀書擊劍]”고 하였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사람됨이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형가는 학문이 있는 은일지사이지 결코 거칠고 경망스런 시정잡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왕을 암살하기 전에 살인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나중에 연나라 태자 단이 영정(嬴政)을 암살할 자를 찾을 때에 먼저 전광(田光)을 찾아갔으나 전광은 이미 나이가 들어 그의 문하의 형가를 추천하였다. 처음 형가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태자가 상경(上卿)으로 모시고 지극한 예로 대우하자 마음을 돌렸다. 형가는 원래 힘을 보탤 수 있는 친구를 찾아 함께 진나라로 갈 계획이었으나 태자가 급하게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진무양(秦舞阳)을 데리고 진나라로 떠났다. 흔쾌히 약속을 실행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가가 협사의 담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리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한조기(韓兆琦)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가는 무예가 고강하고 의협의 기개와 풍모를 갖췄다. 그가 진왕을 암살하려던 의거는 강한 진나라에 대한 국가적 원한과 가정의 원한에서 기인하였다.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는 연나라와 친척이나 친구의 관계가 전혀 없었다. 연나라 태자 단이 영정을 암살하려는 데는 사적인 복수를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형가의 목적은 6국의 백성을 구하려는 협의(俠義)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태자 단은 처음에는 형가를 중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진왕을 암살을 도모하면서도 완전히 형가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형가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의 가치는 개인의 의기(義氣)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폭정에 맞서 싸우려는 결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역사가들은 형가가 그렇게 고결하고 사심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장전새(張傳璽)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형가는 개인주의 시대에 살면서 일종의 ‘의(義)’의 관념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분명 용감했다. 그러나 그의 ‘義’는 결국 개인적인 작은 ‘義’일 뿐이다. 진시황의 통일의 대업이 큰 ‘義’라 할 것이다. 따라서 형가를 드높은 영웅적 인물이라는 정도까지 추켜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성군(陳成軍)은 견해는 더 독특하다. “심지어 형가는 자객의 능력과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 사실 형가는 전국시대에 유행했던 종횡가의 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고 유세를 좋아하였다. 어느 정도의 학문을 갖추었기에 협사(俠士)라고는 할 수 있어도 무부(武夫)는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성군은 형가가 어째서 처음에는 태자 단이 진왕을 암살하자는 요구를 거절했고 나중에도 시간을 질질 끌었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자객을 기다렸다. 암살을 실행할 능력 있는 무사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태자 단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재촉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진무양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무양은 거리에서 살인을 하는 시정잡배와 같은 작은 배역에 불과하였다. 진나라 궁전에 들어서자 안색이 변했는데 이는 자연스런 일이다. 형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주인공 역을 맡아 행동에 옮겼을 뿐이다.”

 

 

형가가 무공을 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 능력을 갖춘 자객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형가는 중국인들의 마음에 진정한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웅은 사람들이 감복시키고 감동케 하며 전율을 느끼게도 한다. 형가야말로 중국인들에게 있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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