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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3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현관장(懸棺葬)은 고대 장례풍속의 하나다. 중국 남방 소수민족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현애절벽(懸崖絶壁) 위에 나무를 박아 목관을 올려놓은 풍속이다. 높이 달면 달수록 죽은 사람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런 장례풍속에 대한 기록은 일찍부터 보인다. 사천(四川), 운남(雲南) 등지에 이런 장례풍속이 있었다.

 

목관(木棺)을 높이 매다는 현관장례는 특수한 장례풍속이다. 문헌 기록에 근거하면 춘추전국(春秋戰國) 시기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백월(百越)’의 활동 범위에 속한다. 월(越)족은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중국 고대 남방 민족을 ‘越’이라고 불렀다. 속한 부족들이 많아 ‘百越’이라고도 불렸다. 중국의 동남방과 서남부 지역을 포함한다.

 

‘백월’ 민족의 장례 제도는 높은 절벽을 이용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암벽 위나 동굴에 시신을 안장하여 짐승이나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고고학 발굴에 따라 절벽이나 높은 동굴에 고분을 만드는 제도는 무이산(武夷山) 지대를 따라 오령(五嶺)과 천전(川滇 : 사천성과 운남성)일대 등 13개 성과 자치구에 유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 풍속은 진한(秦漢) 시기부터 동남의 연해가 연이어 중원 민족에 복속되면서 백월지역 왕조가 소멸되었고 민월(閩越)문화도 점차 한문화에 융합되면서 전통적인 장례법도 토장묘제로 바뀌었다. 이런 장례문화는 오랜 시기에 걸쳐 유행했으며 일반적이지 않다는 특징 때문에 역사가들과 민족학자들에 의해 중시돼 지금까지 연구되고 있다.

 

 

복건(福建)성 무이산 지역의 송계(松溪)현 화교(花橋)향 밖의 심산 절벽 위에 큰 동굴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만관동(萬棺洞)’이라 부른다. 동굴 안에는 수백 기의 목관이 놓여 있다. 대 위에 층층이 쌓여 있는데 아래층은 이미 썩었지만 상층에 있는 목관들은 비교적 온전하다. 이러한 관들은 시대를 따라가다 보면 현 중국이 건국된 이후의 관도 보인다.

 

송계현은 무이산맥 지역에 속하며 절강(浙江)과 잇닿아 있다. 당시 민월 민족의 주요 활동지역으로 민월 민족의 사적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장례 풍속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나라 무제 때에 민월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장회(江淮)[장강(长江) 중하류와 회하(淮河) 유역]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당시 이주한 부류는 귀족계급 위주였지 전부가 옮겨 간 것은 아니었다. 『송서․지리지』에 “산곡으로 도망친 자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 것과 같다.

 

민(閩 : 복건성)의 북쪽 지역은 월족들이 활동했던 중심지였다. 화교향의 ‘만관동’의 절벽 동굴에 장례하는 풍속은 산속으로 도망을 간 월족의 후손들이 세상에 남긴 유물은 아닐까? 당시에 현관 장례 풍속을 가지고 있던 토착민족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흔적 없이 사라지고 거기에다 무이산의 신선에 관한 전설이 가미돼 후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고대 유적을 보면서 옛날을 회고하고 감탄하는 것 이외에 끊임없는 가설과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낳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비한 고대 유적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남조(南朝)에 초자개(肖子開)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이산과 무이산맥에 속한 난간산(欄杆山)을 유람하다가 절벽에 안장된 유적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게 되었다. 이 고인이 고서의 기록을 찾다가 그곳이 신선이 거주했고 신선들의 뼈를 묻은 지역이라고 말하는 옛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민간을 돌면서 소식을 묻다가 무이산군(武夷山君)이라는 신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 기록을 통해 자기 스스로 그런 유적들이 신선이 거주하다가 승천하면서 남긴 뼈들을 장례한 것이라 믿어 버렸다.

 

 

송(宋)나라 때 사람들은 이 천고의 유적에 대해 옛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송나라 때 지리지인 『여지기승』에는 이좌사(李左史)의 무이산 신선 유적에 관한 시가 실려 있다.

 

玉棺揷偏兩岩傍(옥관삽편양암방)
有罅開如小洞房(유하개여소동방)
煉就陽魂歸紫府(련취양혼귀자부)
空餘靈骨此中藏(공여령골차중장)

 

무슨 말인가? 옥관이 양쪽 절벽 틈새에 꽂아 있는데 틈새를 열면 조그마한 동방만하다. 신선이 수련 후 성취를 이뤄 혼은 이미 자부에 돌아갔고 동굴 내에는 영골(靈骨)만 보관돼 있다는 뜻이다.

 

즉 송나라 사람들은 현관 유적이 신선들이 하늘로 올라간 후 선골(仙骨)을 숨겨 둔 곳이라 생각했다. 신선들이 그 석실에서 수련을 하다가 신선이 된 후 신선들의 세계인 자부(紫府)로 올라가고 신선이 될 때 탈피한 뼈만 남겨 뒀다는 얘기다. 이처럼 남겨진 뼈는 자신이 신선이 되는 방법으로 여겼고 고대인들은 신선 수련의 방법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이른바 도교의 선술인 ‘선태(仙蛻)’다.

 

이외에 이 천고의 유적에 대해 송나라 사람들은 다른 관점도 가지고 있었다. 『여지기승』에 무이산 속에 선기암(仙機岩)이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석실이 있고 석실 안에는 ‘선기(仙機)’라 부르는 기저(機杼), 즉 베틀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석실을 신선이 베를 짜는 곳이었다고 생각하였고 석실에는 신선들이 사용했었던 베틀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명청(明淸)시대의 사람들은 절벽 틈새와 동굴 밖의 ‘홍교판(虹橋板)’이 위통(胃痛)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재를 예방할 수 있고 사악함을 물리쳐 안녕을 누리고 장수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무이산지』19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무이산에는 홍교판이 많다. 대왕봉, 대장봉, 소장봉, 고자봉, 금계동 등 곳곳에 있다. 비록 오랜 기간 비바람에 흔들렸지만 여전히 목판들은 부패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쉽게 가지고 올 수 없다. 일찍이 목판이 흔들려 떨어졌는데 그 나무는 검으면서도 빛을 발했다고 한다. 침향나무와 유사하여 무늬가 특히 견실하였다. 현지 백성들은 그것을 귀하게 여겼고 그런 목판이 위통을 치료할 수 있고 화재를 막아내며 사기를 몰아낼 수 있다고 여겼다고 전해 온다.

 

 

청(淸)대 동천공(董天工)은 『무이산지』19권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그 선골(仙骨)을 이용하여 어떻게 비를 내리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그런 선골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음을 기술하였다. 그는 무이산의 많은 산봉우리에 유골이 있으나 어떤 것에 근거하여 신선의 유해라고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신선이란 순식간에 만 리를 유람하는데 10년이란 세월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낡은 신발을 버리듯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데 하필 자신이 껍데기를 애석하게 여겨 부패하지 않게 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뱀이나 매미 같은 미물들도 껍데기를 훌훌 벗어던지고 뒤돌아보지 않는데 신선이란 자가 뱀이나 매미보다도 못하다는 말이냐며 의문을 던졌다.

 

존재의 유무를 떠나 신선이라면 당연히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썼던 껍데기에 연연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객관적이라 하겠다. 전통적으로 뿌리 깊게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테두리를 넘어 대담하게 독립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도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이산에 수천이나 되는 현관(懸棺)들이 있다. 안장한 것이 신선이 아니라면 누구를 모신 것인가? 어떤 부락의 촌민들이 남겨 놓은 것인가? 어느 민족들이 무슨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인가? 이 비밀을 풀어헤칠 수 있는 이를 그저 기다릴 밖에.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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