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타(華佗 : ?-208), 자는 원화(元化), 패(沛)의 초(譙, 현 안휘성 박[亳]현) 사람으로 한나라 말기의 의학자다. 화타(華佗/華陀)는 ‘선생’이라는 뜻의 존칭을 붙여 부르던 것이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며 부(旉)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동봉(董奉), 장기(張機)와 더불어 한나라 말기에 출현한 ‘건안(建安) 삼신의(三神醫)’로 불리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주(周) 나라 때의 전설적인 의사 편작(扁鵲)과 더불어 명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의술에 정통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침구 등 여러 분야에 능통했으며 특히 외과에 뛰어났다. 그가 처음 사용한 마취제인 ‘마비산(麻沸散)’은 고대 외과수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오금희(五禽戱)’는 양생과 관련된 의료 체조로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데 있었다.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산실됐다. 조조(曹操)가 치료하라고 불렀는데 거절하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신의라 불리는 화타는 동한(東漢) 말기의 의학자로 일생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술을 행해 명성이 자자했다. 의학에 있어 여러 방면에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후한서․화타전』에 질병이 인체 내에 발병했는데 침과 약으로 고치지 못하면 먼저 마비산을 술과 함께 복용케 해 마취시킨 후 배나 등을 갈라 덩어리를 꺼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창자나 위에 있으면 갈라 곪은 부위를 제거한 후 봉합하고 신기한 고약을 바르면 4, 5일이면 상처가 아물고 1개월 이내에 평소처럼 회복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화타가 행한 수술은 현대 외과수술과 서로 부합된다. 먼저 ‘마비산’으로 환자를 마취시키고 개복해 수술하고 병이 있는 부분을 도려낸 후 봉합하고 ‘신비한 고약’을 상처에 바랐다. 화타가 개복 수술을 할 때 마비산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세계 의학사상 최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서양보다 천육백 년이나 앞선다. 화타의 성취는 모두가 인정하지만 역사서에 화타가 개복 수술을 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현대 유명 학자인 진인각(陳寅恪)은 『한류당집(寒柳堂集)』에서 “장을 자르고 배를 갈라 수일이면 완쾌 됐다고 하지만 학술 진화사적으로 헤아려 볼 때 당시에는 그런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화타의 수술이 21세기의 수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화타의 개복 수술은 인도의 명의에서 연화해 왔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불경『동여기역인연경(棟女耆域因緣經)』에 기역(耆域)은 아뜨레여 푸나르와슈(Ātreya Punarvasu)에게서 의술을 배워 여러 가지 약물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해부학을 자세히 연구해 인체의 오장육부의 여러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불룩한 복강을 열어 장과 위의 질병을 치유하거나 말에서 떨어져 죽음을 앞둔 남자의 복강을 열어 간장의 위치를 정상으로 돌리는 수술을 했다는 등등의 의술을 행했다. 인도의 불교는 화타 생존 시기에 이미 중국에 유입됐었다. 그래서 그러한 신화도 이와 함께 전래돼 민간에 신의로 알려진 화타가 그걸 행했다고 알려진 것이라고 보았다.
페트로프(Petrov) 주편의 『의학사』에 노예제 시기의 고 인도, 고 바빌로니아, 그리스 의학 중 당시의 의사들이 식물을 이용해 마취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중 독말풀을 외과수술의 중요 마취약으로 사용한 것은 오래 됐다. 그래서 화타는 외과 마취수술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 최초’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존재하지만 화타의 뛰어난 의술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화타는 질병 예방을 중요시 했다. 신체 단련을 강조하면서 체력 증강에 힘썼다. 그는 “인체는 노동을 원한다. 단지 심하면 안 된다. 움직이면 곡기가 소화되고 혈맥이 유통되며 병이 생기지 않는다. 회전하는 문지도리는 썩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는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의 동작과 자세를 모방해 ‘오금희’를 만들었다. 몸이 불편함을 느끼면 짐승의 동작을 하면서 땀을 내면 몸이 가뿐하고 상쾌해 진다고 했다. 그의 제자 오견(吳堅)은 ‘오금희’를 평생 연마해 90여 세를 살았으며 귀와 눈이 어둡지도 않았고 치아 건강을 끝까지 유지했다.
『삼국지연의』에는 화타가 주태(周泰)와 관우(關羽) 등을 치료해준 이야기가 전한다. 특히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치료할 때 관우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연히 마량(馬良)과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조조는 오랫동안 두통을 앓았다. 여러 번 화타를 불러 치료 받았으나 병이 만성이 돼 쉽게 치료되지 못했다. 조조는 지병이 재발할까 염려해 화타를 강제로 시의(侍醫)로 임명해 머무르게 했다. 화타는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임종 전에 화타는 이미 정리한 의학서의 원고를 옥리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옥리는 연루될까 두려워 받지 않았다. 화타는 비통하고 분해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만약 화타가 평생 심혈을 기울려 저술한 의학서가 남아있었다면 화타와 관련된 여러 가지 논쟁은 저절로 풀렸을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