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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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애제(哀帝 : 기원전 25 - 1) 유흔(劉欣)은 원제(元帝)의 적손이다. 3세에 왕이 됐고 수화(綏和) 원년(기원전 8)에 황태자가 됐으며 2년 4월에 제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에 외척을 중용하고 총신 동현(董賢)을 가까이 해 정사를 맡겼으며 심지어 동현에게 선위하려고까지 했다. 마비 질병을 얻어 원수(元壽) 2년(기원전 1년) 6월에 죽었다.
다시 말해 한 애제는 원제의 손자로 성제(成帝)의 조카다. 3세에 중산(中山)왕에 봉해졌고 19세에 황위를 계승하여 존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 애제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악부관(樂府官)을 폐지하는 등 사치한 생활을 반대했다. 그리고 제나라 삼복관(三服官, 면복 직조를 관리하는 관원)을 면직시키는 등 신민들에게 생활의 검소를 제창했다. 애제는 스스로 1후(后)를 세워 후궁을 축소시켰으며 소박하고 평담한 생활을 했다. 애제가 행한 이러한 일들은 중국 역사 고금을 통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랬을까?
성제 때 토지 겸병이 심해 곤궁한 농민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에 반해 세금은 너무 과중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성제가 창릉(昌陵)을 축조하면서 거금을 소비했고 백성들의 묘지 수만 기를 없앴으며 몇 십만 명의 유민이 생기면서 백성의 원한이 그치지 않았다. 성제 연간에 매해 수재가 발생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타지로 흘러들거나 노예가 됐다. 곤궁한 농민들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자 끊임없이 봉기했다.
성제 초년 관중(關中) 남산(南山)에서 수백 명이 봉기했고 하평(河平) 3년 동군(東郡) 후모벽(侯母辟) 5형제가 무장봉기했으며 양삭(陽朔) 3년 영천(潁川) 철 생산에 동원된 죄수 180인이 봉기했고 홍가(鴻嘉) 3년 광한(廣漢) 봉기, 영시(永始) 3년 봉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농민봉기는 진압되기는 했으나 왕조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반증인 셈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왕망(王莽)이 조정을 농단하고 있으면서 한 왕실의 천하를 넘보고 있었다. 관료들은 부패해 정무를 아무렇게나 보고 있었고 계급 간 모순이 극에 달해 농민들의 원망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는 등 위기가 고조돼 있었다. 애제는 계급 간 갈등을 완화시키고 인심을 달래어 통치를 공고히 해야 했다.
애제는 악부관을 폐기하고 퇴폐적인 음악의 범람을 금지했다. 애제는 줄곧 무도한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반대하고 평담한 생활과 근검절약을 제창했다. 이와 동시에 제나라 삼복관을 없애고 다시는 면복 직조를 관리하는 전문 부서를 설립하지 않았다. 신민이 의복을 소박하게 입도록 주창했다. 애제는 과도한 소비를 감소시키면서 표면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축소해 곤궁한 백성의 마음을 달래고 충동적으로 봉기하는 원한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애제 개인 생활도 비교적 검소했다. 역사서에 “본성이 성색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애제는 정도왕(定陶王) 시절에 왕비를 맞이했는데 태자가 된 후 왕비를 태자비로 세웠고 황제가 된 후에는 태자비를 황후로 세워 애정이 바뀌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끝까지 원처와 함께 했다. 애제는 천자의 자리에 앉았으나 성색을 탐한 적 없이 소의(昭儀) 한 명만 세웠다. 동소의(董昭儀)의 거처는 초풍(椒風)이라 명명하고 황후가 거처하는 초방(椒房)과 상응하게 만들어 위아래 구분을 두지 않았다. 동소의는 총애를 받았으나 그녀가 사는 곳은 무척 간소했고 생활도 간단하고 평범했다.
애제의 개인 생활이 이처럼 담백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본을 받게 하기 위한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대 제왕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제 개인에게는 특수한 속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일까?
애제는 신약했다고 전해온다. 여색을 그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흥미를 줄이는 대신 남성에게서 보상받았다. 바로 ‘남총(男寵)’이다. 애제의 남총은 동현(董賢)이다. 그의 시종이었다.
어느 날 동현이 황제에게 어떤 일을 보고할 때 애제가 그를 한 번 보고는 반해버렸다. 후에 황문랑(黃門郞), 부문도위시중(駙門都尉侍中)의 직책을 내리고 특별히 총애했다. 동현은 황제를 모시고 같이 동침했다.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동현이 애제의 옷소매를 깔고 누워있게 됐다. 애제는 일어나기는 해야 하지만 동현이 깨는 것을 원치 않아 칼로 옷소매를 잘랐다. 애제가 얼마나 동현을 사랑하고 아끼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것이 ‘단수지벽(斷袖之癖)’이다. 이때부터 동성애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동현은 아름답고 부드럽고 상냥했다고 한다. 곱고 사랑스러워 애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동현의 누이동생은 소의에 봉해졌고 동현의 아버지, 큰아버지, 처남도 높은 관직에 올랐다. 동현은 고안후(高安侯)가 됐다가 대사마(大司馬)가 됐다. 막강한 권력이 천하에 미치게 되면서 실권자들을 멸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동현은 겉모습만 번지르르할 뿐 실제로는 재능과 학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애제는 독서를 많이 해 치국의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애제가 어떻게 대사마라는 중요한 직책을 시종 출신인 동현에게 맡겼을까?
애제 즉위 초기, 외척 왕(王) 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애제는 군정(軍政) 권력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 씨 권력을 제거해야 했다. 애제는 자기의 외척인 정(丁) 씨를 이용해 왕 씨 외척을 대체하고 권력을 뺏어왔다. 그러나 정 씨들을 존귀한 자리에 앉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실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후에 대사마 정명(丁明)을 파면하고 동현을 그 자리에 앉혔다. 꼭두각시인 동현을 대사마에 앉히니 모든 권력은 애제의 수중에 놓이게 됐다. 이로써 애제는 잠시나마 군주집권을 실현하게 된다. 애제가 동현을 존중하면서 각 파벌의 조야 세력을 제지하고 제어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애제는 간소화를 제창했고 사회 빈부 격차에 따른 모순을 완화시켰으며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현실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사회의 모순은 더더욱 격화됐다. 애제가 동현을 중용함으로써 대권을 되돌려 받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실재로는 왕망(王莽)이 권토중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제는 택지와 노비 수를 한정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대지주의 이익에 반했고 반대에 직면하게 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돼 버렸다. 애제의 조치들은 유익한 것이었으나 이미 기울어진 한 왕조의 위기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유 씨의 천하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애제가 검소한 생활을 한 것은 진짜로 자신의 품성에 의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였을까?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다만 기울어져가는 한나라 왕실을 위해 검소한 생활을 진작시키며 뒤돌아선 민심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인물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철학이 있더라도 떠난 민심을 얻는 것은 역시 더불어 논할 인재들이 있어야 한다. 애제 곁에는 동현이라는 ‘남총’이 있었을 뿐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