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5 (목)

  • 구름많음동두천 -3.0℃
  • 맑음강릉 2.3℃
  • 구름조금서울 1.5℃
  • 구름많음대전 1.0℃
  • 흐림대구 2.3℃
  • 구름많음울산 3.5℃
  • 맑음광주 4.1℃
  • 구름많음부산 5.7℃
  • 구름많음고창 6.8℃
  • 구름많음제주 10.4℃
  • 구름조금강화 -2.5℃
  • 구름많음보은 -0.7℃
  • 흐림금산 0.0℃
  • 구름많음강진군 3.8℃
  • 흐림경주시 4.7℃
  • 흐림거제 5.8℃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자치통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연나라 사람 송무기(宋毋忌)와 선문자고(羨門子高)의 무리들이 선도(仙道)와 형해소화(形解銷化)의 술책이 있다고 하였는데 연나라와 제나라의 어리석고 괴이한 사람들이 다투어 이를 전하고 익혔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연나라 소왕(昭王)도 모두 그들의 말을 믿고 바다에 나아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찾아오게 하였는데, 이 산신은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산신이 거주지를 갈석산(碣石山)이라 하기도 한다.

 

갈석산은 중국 하북(河北)성 진황도(秦皇岛)에 위치한 산이다. 창리(昌黎)에 원추형으로 우뚝 솟아있으며 하늘을 찌르는 기둥과 같다고 하여 갈석이라 이름 붙였다. 능선의 기복이 커 100여 개의 절벽과 봉우리가 형성돼 있다. 최고봉인 선태정(仙台頂)은 ‘한무대(漢武臺)’라고도 하며 낭낭정(娘娘頂)이라고도 한다.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汉武帝), 당태종(唐太宗), 위무제(魏武帝) 등 7대 제왕들이 이곳에 올라 바다를 둘러봤으며 바위에 그들의 공적을 새겼다.

 

 

중국은 명산대천이 수 없이 많다. 봉건 제왕들이 총애를 받는 명산은 대부분 웅장하며 범속하지 않다. 그러나 갈석산은 해발고도가 얼마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특별한 자태도 없으며 뛰어난 풍채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진나라, 한나라부터 당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7대 제왕들이 갈석산에 올랐을까? 7대 제왕 중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영걸인 진시황, 한무제, 위무제와 당태종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진2세,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그들이다. 거기에다 진나라 선제 사마의(司馬懿)와 수나라 양제(煬帝)를 포함하면 9대 제왕들이 갈석산을 올랐다. 왜 그랬을까?

 

그중 몇 번은 전쟁과 관련이 있다. 위 무제 조조(曹操)는 오환․반사(烏桓․班師)를 치기 위해 갈석산을 지났고 사마의는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기 위해 갈석산에 갔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와 전쟁을 위해 ‘갈석도(碣石道)’를 뚫었으며 당 태종도 역시 고구려를 치기 위해 갈석산을 지났다. 이 4번 이외에 5명의 제왕들이 갈석산에 오른 것은 전쟁과는 무관하다. 만약 순수하게 큰 파도가 솟아오르는 창해를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갈석산 이외의 해변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그리 뛰어나지도 않는 갈석산으로 갔을까? 갈석산에 사람을 끄는 신비함이 있다는 말인가?

 

북송(北宋) 『자치통감』의 기록에 나오는 손무기, 선문자고는 어떤 사람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송무기는 『도경(道經)』 속의 월중선인(月中仙人)이고 선문자고는 갈석산에 살고 있는 신선이라고 했다. 바로 이런 신선들 이야기 때문에 중국 역사상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지녔다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신선을 구하기 위해 갈석산을 찾았던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에 “32년, 시황이 갈석산에 가서 노생(盧生)으로 하여금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하고 갈석문을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원래 진시황은 ‘서불동도(徐巿東渡)’의 전설을 만들 만큼 거의 미칠 정도로 장생불로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복(徐福)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내주고 동해에서 신선을 찾으라 했으면서도 가만히 궁에 앉아 기다릴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진시황은 아예 직접 갈석산에 가서 이름을 지명하면서 신선을 찾게 했다는 것이다. 갈석산에서 신선을 만나지 못하자 진시황은 노생에게 바다로 나가 찾아보라고 했다. 노생은 동해에 나가는 척하다가 돌아와서는 신선이 사사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바로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亡秦者胡也]’라는 예언이다.

 

 

진시황은 예언이 북방의 ‘胡人(호인 : 오랑캐)’에 대한 것이라고 여겼다. 북방의 흉노(匈奴)는 진의 통치를 위협하는 막대한 세력을 갖춘 유목민족이었다. 이에 장군 몽념(蒙恬)에게 군사 30만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라며 대장정을 명한다. 후에 동한(東漢)의 경학가인 정현(鄭玄)은 진시황 때 신선이 남겼다는 ‘胡’는 흉노와 같은 북쪽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아끼던 18번째 아들 호해(胡亥), 즉 나중에 폭정을 일삼다 조고에게 죽임을 당한 진2세를 가리킨다고 했다. 거짓에서 시작되고 거짓의 속임수로 엮어진 웃지 못 할 역사의 아이러니다. 노생이 어찌 동해에서 신선을 만나 예언을 받았겠는가. 허언에 불과한 면피를 위한 우수개소리 때문에 북방에는 전쟁이 발생했고 심지어 대학자로 칭송받는 정현까지도 이에 동조했을까?

 

한무제도 마가 낄 정도로 ‘신선’을 구하기 위해 애쓴 황제다. 기원전 110년 무제는 태산에서 봉선(封禪)을 거행한 후 친히 동해로 나가 봉래 신선을 만나 장생불로 약을 구하려 했었다. 동방삭(東方朔)의 만류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끝끝내 동해를 따라 북쪽으로 강행군하여 갈석산에 오른 후 대를 건축하고 신선을 찾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현재까지 ‘한무대(漢武臺)’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절대 권력을 장악한 중국 고대 황제들이 한 일이란 것이 이렇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갈석산으로 가서 신선을 구한 행태 때문에 갈석산은 명성을 얻게 됐다. 갈석산의 신선에 대한 신비감을 높였고 연쇄 반응으로 후대의 많은 제왕들이 앞 다퉈 갈석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갈석산을 오르면서 신선을 만나거나 아니면 신선과 같은 기운을 얻어 장수하거나 장생불로의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갈망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렇게 많은 제왕들이 불원천리하고 고생고생 갈석산에 올랐는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당나라 때 팔선(八仙)의 전설이 생겨난다. 그러자 갈석산은 팔선과 관련된 유적들이 수도 없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동오봉(東五峰) 백원동(柏源洞)의 천연 수성노인(壽星老人 : 남극선인)과 장과로(張果老)상, 과로원 유적, 서산 ‘상자영(湘子影)’, 동산의 관음보살 선좌와 채수와(蔡樹洼)의 은선암, ‘선인대’, ‘선인정’과 ‘낭낭정’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갈석산의 신비한 분위기를 북돋았으며 황제들이 등산하여 신선을 찾으려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은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 썼다는 「관창해」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갈석산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다.

 

觀滄海 창해를 봄
曹操 조조
東臨碣石 以觀滄海 동쪽 갈석에서 푸른 바다를 보네
水何澹澹 山島竦峙 물은 넉넉하고 섬은 우뚝 솟아있도다
樹木叢生 百草豐茂 수목이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한데
秋風蕭瑟 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파도가 일어나네
日月之行 若出其中 달과 해의 운행도 그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 若出其裡 은하수 찬란함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듯
幸甚至哉 歌以詠志 다행히도 나는 보았다. 그 뜻을 노래하노라.
-作于建安十二年秋 (207년 가을에 짓다)

 

 

하북성 동쪽 끝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고대의 진짜 갈석산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9황제가 등정했다는 진짜 갈석산은 원래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갈석산을 설명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우공』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우측 끝의 돌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 『공전』에 전하기를 “갈석은 해반산이라고 한다.” 즉 갈석산은 황하 변에 있다는 말이다.
『한서무제기주』에 “문영이 말하길 갈석은 요서군 누현에 있다.” 『수경주』에 전하기를 “(요서군의) 임유 남쪽 물 가운데 있다.” 또한 『수경주』의 「유수주」에 전하기를 “유수는 동남쪽으로 누현 갈석산까지 흐른다.” 『명일통지』에는 창려 서북 50리에 있다고 한다.
『한서지리지』에 “우북평군 여성현은 대갈석산 서남에 있다.” 『우공추지』에 “여성의 산을 대갈석산으로 칭했다는 것은 소갈석산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후한서군국지』에 “갈석산은 상산 구문현에 있다.”
『사기정의』에 “갈석은 유주 계현 서쪽 35리에 있다.”
『사기색은』에 “태강지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당서지리지』에 “영주 유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수서지리지』에 “북평군 노룡현에 갈석이 있다.”

 

종합하면 갈석산은 유주에 속한 요서군의 누현과 임유현과 유성현, 우북평군 여성현, 계현, 낙랑군 수성현, 북평군 노룡현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짜 ‘갈석산’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