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왕조는 두 명의 황제, 38년 만에 멸망한다.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北周)를 대신해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수(隋), 대흥(大興, 현 서안)을 수도로 정했다. 9년에 진(陳)을 멸하면서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지금의 위구르 동부까지, 서로는 운남(雲南), 광서(廣西)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고비사막에 이르는 지역을 강역으로 삼았다. 양제(煬帝) 10년(611)부터 농민봉기가 계속 일어나 수나라는 멸망했다.
중국 이천여 년의 봉건 역사 중 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수(隋)나라도 건국 초기에는 ‘강성한 군대’를 보유했고 ‘만리 강역’을 이루었지만 2대밖에 전하지 못하고 멸망한다. 이러한 상황은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수나라가 2대에 망한 이유는 당연히 두 명의 황제 때문이다. 멸망을 초래한 수양제 양광(楊廣)이 수 왕조의 멸망의 가장 큰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강산은 부친이 가업을 승계한 것처럼 그저 전승받은 것으로 천하를 놓고 쟁패해본 경험이 없었다. 양광은 황음무도하고 흥청망청했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무분별한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수서․양제기』에 “상을 받은 자는 그 공을 보지 않고 살육하는 자는 그 죄를 몰랐다. 교만한 가운데 군대를 자주 동원했고 토목공사는 쉬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는 당연히 농민봉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고 끝내 왕조의 붕괴를 야기했다.
그러나 역사적 시각으로 수나라 멸망의 원인을 고찰하면 한 사람 때문이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다. 당(唐)나라 위정증(魏征曾)은 수나라는 일찍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초기부터 망할 징조가 있었다고 봤다. 수의 멸망은 “고조(양견)에서 시작해 양제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연원은 깊다.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관점은 근거가 있다. 수나라는 문제 때부터 금이 가 무너질 징조를 보였다는 말이다.
수문제 양견은 수 왕조를 개국했다. 수나라가 정권을 세우는 과정은 강성했던 다른 왕조의 개국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수나라는 전쟁에서 얻은 나라가 아니다. 북주의 황제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외척 권신이란 신분을 가지고 ‘고아와 과부’의 손에서 탈취한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언어가 바르게 잡히질 않는다[명부정,언불순(名不正,言不順)]”고 하지 않던가. 명분이 정당하지 않으면 조리가 서지 않는 법이다. 결국 양견도 황제에 자리에 있으면서 조마조마하고 불안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불복할 것이 두려웠고 부하들을 시샘했다. 결국 많은 충신들과 능력 있는 장수들이 푸대접 받았다. 심지어 나중에는 주살하기 시작했고 공신과 노장들을 배척했다. 그렇게 통치 집단 내부에 이미 분열돼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592년 상서우복사(尙書右仆射) 소위(蘇威)가 예부상서(禮部尙書) 노개(盧凱) 등과 함께 ‘붕당(朋黨)’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면직됐다. 이때 유명 인사 100여 명이 죄를 뒤집어썼다. 『수서』에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손들이 계속하여 도륙하니, ……천하는 이미 수 왕조 것이 아니었다.”고 평하고 있다.
양견이 황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사치를 일삼기 시작했다.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평산(平山)의 공지를 메워 그의 향락에 쓰일 인수궁(仁壽宮)을 건축했다. 자기의 향락을 위해 백성이 힘들고 재물이 고갈되는 것을 돌보지 않아 수만의 백성들과 인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소수민족에 대한 진압이 잔혹했다. 민족 갈등이 극에 달하자 소수민족들이 끊임없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윗놈이 하면 아랫것들도 따라한다고 하지 않던가. 각급 관리들도 따라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으니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 상하의 착취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물론 양견도 처음에는 일국의 군주답게 잘한 일면도 있다. 그가 정무를 시작할 때는 폐단을 없애는 개혁을 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추구했다. 정치적이 면으로 황권을 강화시키면서 내부의 안정을 공고히 하는 조치들을 연이어 취했다. 경제적인 면에서 북주와 달리 부역을 줄이면서 민심을 얻었다. 양견은 또한 사람을 각지에 파견해 사회 상황을 살폈고 재난을 당한 지역을 구휼하여 백성들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양견의 통치아래 수 왕조는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나마 국력이 강성했다고 할 수도 있다. 당나라 때 사가들은 수문제 때에는 “치세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근대의 좋은 군주라고 할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수문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사회 모순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수 왕조의 멸망은 벌써부터 조짐이 보였고 망국으로 가는 추세였다.
중국 역사상 비교적 오래 유지됐던 왕조는 대부분 대규모 농민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한(漢), 당(唐), 명(明), 청(淸) 모두 여기에 속한다. 봉건 사회에서 계급적 억압은 결국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해지고 계급끼리의 모순이 연속적으로 누적되면서 대규모 반발을 불러왔다. 봉기가 일어나면 모순이 어느 정도는 완화될 수 있었다. 수 왕조는 비교적 쉽게 건국했다. 그랬으면서 통치자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도 않고 개혁도 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사치와 낭비, 개인적 음락만을 추구하면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니.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정권이 권력만을 누리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는가? 이는 중국의 역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제국(帝國)’의 한계에 기인한 점도 많지만 다른 왕조들과는 또 다른 수나라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 점이 많다. 제왕이 중심이 되는 제국에서 제왕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