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
진시황(秦始皇) 34년(기원전 213)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를 반대하자 이사(李斯)가 조정을 비방한다고 질책하면서 유생이 옛 것을 가지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진기(秦記)』이외의 열국의 역사서를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린다. 다음 해 노생(盧生), 후생(侯生) 등이 진시황을 공격하자 460여 명의 방사(方士)와 유생들을 함양에 생매장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분서갱유’라는 쇼킹한 설은 진시황이 대규모로 서적을 불사르고 지식인들을 생매장했다는 사건을 가리킨다. 그런데 분서갱유에 대한 관점은 역사적으로 의론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사마천은 『사기․진시황본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시황 34년(기원전 213) 황제가 함양의 궁전에서 여러 군신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대신들은 그 기회를 틈타 황제의 위덕을 칭송하는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순우월은 달랐다.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신은 은상(殷商)의 여러 나라들이 천 년을 유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여러 왕들에게 분봉하고 대신들에게 보좌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셨으면서도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나라 전상(田常)과 같은 야심가가 나타난다면 황제의 강산이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을 본받아 분봉하시지 않으면 대대손손 보좌를 이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승상 이사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옛날 오제삼황이 정치를 함에 다시 하지도 않았고 인습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천하는 잘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망언을 할 수 있습니까? 순우월이 옛 3대의 지난 일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유생들은 지금은 잘못됐으니 옛날을 배워야 한다면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어지러웠고 통일되지 않았었습니다. 사학(私學)을 끼고 앉아 옛 것을 가지고 현재를 비판한 때문입니다. 지금은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데도 사학으로 정치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렇게나 왈가왈부하고 자기선전을 일삼으며 서로 높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군중을 모아놓고 조정을 비방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황제의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붕당을 맺어 계속 천하를 어지럽힐 것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사학을 다스려야 합니다. 진나라가 기록한 사료가 아닌 것들은 모두 불태워야 하고 박사 관직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시경』『서경』과 제자백가의 저작들은 소장하지 말고 지방 관리에게 바치게 해 불태워야 합니다. 『시』와 『서』를 사사로이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대중 앞에서 참해야 하고 옛 것을 가지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3족을 멸해야 합니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보고하지 않는 관리는 일률적으로 죄를 물어야 합니다. 분서의 명령을 내렸으면서도 30일 이내에 집행하지 않으면 경형(黥刑)에 처하고 4년 노역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서적을 불태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의약, 점복, 식목 등과 같은 분야의 책들은 잘 보관하여 후세에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진시황은 이사의 말을 세심히 듣고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해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오래지 않아 진나라 곳곳에서 분서를 실행해 셀 수도 없이 많은 백가의 저작들이 불태워졌다. 이렇게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서한(西漢) 정론가인 가의(賈誼)는 분서의 목적이 ‘검수(黔首 : 백성)를 우둔하게 하는 백가의 말을 불태우는’ 데에 있다고 했다. 진시황은 문화지식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를 원했고 엄격한 여론 통제를 실행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나라의 역사만이 영광스럽고 옳은 것으로 열국의 역사서는 보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불태워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다르게 판단하기도 한다. ‘분서’는 진시황의 언어문자에 대한 영물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미신을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언어문자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축(祝)사는 사람을 창성하게 하고 저주(詛呪)는 사람에게 재앙을 내린다고. 진시황은 문자를 남용하여 자신을 명망으로 이르게 할 것이라 믿어 모두 불태웠다고 보는 것이다.
‘분서’가 문제되는 것은 사라진 유학 경전들로 인해 한대(漢代) 금고문(今古文)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한(前漢) 초기에 유학경전들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 경전을 복원하기 위해 기억력이 좋은 학자들을 불러 모아 암송시키고 받아 적었다. 이것을 금문(今文)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제(武帝) 때 공자의 옛 집의 담을 수리하던 중 노(魯)나라 문자로 쓰인 경전들이 발견됐다. 이것이 고문(古文)이다. 금문과 고문 경전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로 19세기까지 유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진시황제가 일으킨 분서 사건이 2000년 간 논쟁을 낳게 된 셈이다. [물론 고문은 위서(僞書)라 하기도 한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분서가 진시황만의 작품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사의 진언을 주목해 보자. 전국의 책들을 소각하되 박사관이 관장하는 서적은 태우지 말라고 했다. 즉 진에도 박사제도가 있었으며 진의 수도에 박사들이 관리하는 제자백가의 서적들이 보존돼 있었다. 진시황의 분서로 전국의 책들이 소각됐지만 최소 함양에는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진이 보관한 서적들은 한나라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사기․항우본기』의 “항우(項羽)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실을 불태웠는데 3개월 동안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진이 붕괴된 후 6국의 왕공 귀족의 후손들과 지역 군웅,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 먼저 함양에 도착해 진왕의 항복을 받아낸 이는 유방(劉邦)이었다. 하지만 초(楚)의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유방은 함양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항우 군대가 진군하자 진 왕조의 영화를 상징하던 함양은 항우 군대에 의해 난장판이 됐다. 학자들은 항우가 함양을 불태우면서 함양 궁궐에 보관돼 있던 전적들도 그때 불탔다고 추정하고 있다. 청나라 유대괴(劉大櫆)는 「분서변」에서 ‘진의 진귀한 서적들이 불탄 것은 항우의 죄’라고 비판했다.
또 과연 진시황의 분서정책이 철저히 시행되었는가도 의문이다. 『사기․육국연표』에 ‘『시』『서』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책들이 대부분 민가에 소장되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의 전한시대 분묘에서 발견된 목간들 속에서 진시황제시기에 분서됐다고 알려진 제자백가의 서적들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이와 같이 진의 분서 정책이 지방에서는 철저히 시행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사는 『시』『서』를 말하는 사람은 멸족하라는 형벌을 내렸지만 책을 태우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경형이나 노역형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에 분서 정책은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분서’ 다음 해 진시황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하면서 큰 풍파를 일으킨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유생인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의 잔혹한 통치를 비판하자 진시황이 대노하여 혹세무민한다며 함양에 생매장했다고 했다.
‘유(儒)’들을 생매장했다는 말 때문에 진시황제가 유생들을 공격한 사건이라고 인식됐다. 하지만 이 사건도 엄밀히 말하면 유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의도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을 제공한 인물은 후생과 노생이었다.
후생, 노생이란 후 씨 성의 선비, 노 씨 성의 선비인데 이들은 유생이 아닌 방사(方士)로 봐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된 진시황은 불로장생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황제가 불로장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법을 안다는 방사들이 함양으로 몰려들었다. 후생과 노생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의 효험이 있는 비책들을 건의했지만 사기였다. 결국 후생과 노생은 함양을 몰래 빠져나가 도망친다. 진시황은 이 사실을 알고 격노하면서 명령을 내린다.
“짐이 전에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문학에 종사하는 선비들과 방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태평성세를 일으키고자 방사들로 하여금 각지로 선약을 구하게 했다. 지금 들으니 한종은 한 번 가더니 소식이 없다고 하고 서불 등은 막대한 금액을 낭비하고서도 결국 선약을 구하지 못한 채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면서 서로 고발하고 있다는 소식만 매일 들려오고 있다. 짐이 노생 등을 존중해 그들에게 많은 것을 하사했으나 이제 나를 비방하면서 나의 부덕을 가중시키고 있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함양에 있는 이런 자들을 조사해보니 어떤 자는 요망스러운 말로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어사를 시켜 이런 자들을 조사케 하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했다. 진시황이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 460명을 사형 죄로 판결하여 모두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그것을 알려서 후세 사람들을 경계시켰다.”
‘갱유’는 유학자, 즉 공자의 문도들을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진시황을 속인 방사들에 대한 처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갱유(坑儒}’가 아니라 ‘갱생(坑生)’이다. ‘生’은 유생이란 뜻도 있지만 후생과 노생의 경우처럼 방사 집단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위 기록에서는 방사로 보는 것이 옳다. 『사기․유림열전』의 “진나라 말기에 이르자 『시』『서』를 불사르고 술사들을 매장시켰는데 육예는 이로부터 없어졌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유생들을 생매장한 것으로 인식된 데는 나중에 유학이 부활하면서 ‘갱유’로 변질시켰을 가능성이 많다.
‘분서갱유’는 중국사에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진나라의 통일 정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진은 분서갱유를 통해 이전 6국의 사상, 제자백가 사상을 탄압하여 통일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황제가 지배하는 일원적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 지배의 실현을 원하던 진 왕조는 15년 만에 끝나고 한 왕조가 들어섰다. 한은 진을 부정하면서 들어선 정권이니 진의 정책이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서갱유’ 역시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점차 한 황제들이 유학을 장려하면서 유학적 소양을 지닌 관리들이 정권을 잡게 돼 분서갱유 정책은 진시황제의 폭정의 상징이 돼 버렸다.
이러한 역사 변천 속에서 분서갱유 사건은 과장됐을 가능성이 많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통해 유학을 탄압했지만 기록을 살펴볼 때 분서는 유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전체에 대한 탄압이었고 엄격히 시행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갱유도 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방사들을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이 많다. 한나라에 들어와서 유학이 부활하게 되고 유학에 대한 억압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게 되면서 분서갱유도 유학자들에 의해 유학을 집중적으로 탄압한 사건으로 왜곡된 것은 아닐까?
진시황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중적이다. 현대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적인 군주로 평가한다. 어쩌면 다민족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통합적 시각이 반영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적 사관에 입각한 전통적인 중국의 역사가들은 진시황제를 수(隋)나라 양제(煬帝) 등과 함께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역사는 후대의 필요성에 의해 평가가 달라지는 것처럼 역사적 모순이 여전히 존재하는 인물이 진시황이다. 그 중심에는 분서갱유가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