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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위진풍도(魏晉風度)’를 ‘위진풍류(魏晉風流)’라 하기도 한다. 중국 위진 시대 명사들의 품격과 도량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위진 명사들의 주정주의(主情主義)적 특성을 잘 반영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문인이 즐겼던 ‘풍류’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위진(魏晉) 시기의 문인들, 특히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이야기해야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위진 시기의 청담(淸談)과 유명한 청담가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이는 3, 4세기 ‘풍류’를 신봉하는 인물들을 묘사했다. 유영(劉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영은 늘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 어떤 때는 방에서 알몸으로 있기도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놀리자 유영은 ‘나는 하늘과 땅을 집으로 방을 속옷으로 하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나의 속옷으로 들어오는 것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영은 쾌락을 추구했지만 일상적인 것을 초월했다.

 

 

 

 

이런 초월성을 가지고 있고 도가학설의 양심(養心), 즉 현심(玄心)을 가진 자는 반드시 쾌락에 대해 묘한 감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우아한 쾌락을 추구하게 되며 육체적인 쾌락은 추구하지 않았다.『세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명사’들은 이상한 행위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충동에 의해 행동했지 조금도 육체적인 쾌락을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 사람들은 당시 일부 명인들의 육체와 정신의 미학을 칭찬했다. 혜강(嵆康)을 ‘풍자특수(風姿特秀)’하다고 하여 사람들이 ‘송하풍(松下風)’이라 비유했고 그를 ‘약고송(若孤松)’, ‘약옥산(若玉山)’이라 했다.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은 숙질간으로 “완적이 종인(宗人)과 술을 함께 할 때마다 항상 술잔 대신에 술독[酒盤]을 사용하였으며 술을 담그는 도구도 사용하지도 않고 술독을 에워싸 손으로 술을 마시곤 했다. 때론 돼지들이 와서 술을 마기도 했는데 이때면 내쫓기는커녕 덩달아 같이 마시곤 했다.” 완적은 언제나 술동이 주위에 둘러 앉아 손으로 술을 떠서 마셨다. 때론 돼지와 함께 술을 마셨다? ‘풍류’의 경지라 하겠다.

 

왕융(王戎)에 대한 이야기도 기록돼 있다. “왕융이 아들을 잃어 산간이 찾아왔다. 왕융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산간이 말하기를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더라면 이런 처지까지 되겠는가?’ 이에 왕융은 ‘성인은 정(情)을 버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감정에 좌우됨이 바로 우리 이 세대가 아닌가.’라고 했다. 산간은 이에 더욱 슬퍼했다.” 왕융의 이 말은 무엇 때문에 죽림칠현이 주정파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대부분 상황에서 그들의 동정(動靜)은 어떤 개인의 득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인생의 보편적인 방면에 있었다.

 

‘풍류’라는 단어에는 ‘성(性)’이란 의미도 있었다. 특히 후세의 용법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진나라 시기, 성에 대한 태도는 순전히 심미적인 것으로서 육감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세설』의 기록을 보면 완적이 술에 취한 다음 늘 미인의 옆에 누워 잠들지만 탈선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이성(異性)의 미를 감상했지만 어떤 성애는 절대 포함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미적으로 감상할 뿐 성의 성분에 대해서는 망각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위진풍도’는 이제까지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원인은 대체로 명사들이 술을 즐기고 세상을 돌보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리고 방탕함이 일반적 정리와 부합하였다는 것이다. 청담만을 즐겨 나라를 망쳤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적 각도에서 보면 ‘위진풍도’의 사상적 의의와 미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위진풍도’는 독특한 인생 체험을 중시한다. 자아를 발현하고 긍정한다. 동한(東漢) 말기 『고시십구수』의 가치 관념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자태의 준수와 행동거지의 우아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문학의 자각’의 미학 조류에 융화했다. 약, 술, 용모, 현담은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다. 이면에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고와 인생무상에 대한 비탄이 함축돼 있다. 위진풍도의 미학적 전형은 아름다움의 형식(용모 표일)과 내재 정신(지혜와 근심 고뇌)의 결합을 표현하고 있다.

 

철학적 의미에서 유가 철학은 현학이 흥기하면서 위협을 받았다. 위진 현학은 동한 이래로 사회 역사와 사상 관념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동한 후기 부패한 정치는 유생들로 하여금 다시는 전통적 유가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휘황찬란한 대업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당고(黨錮)의 화’를 시작으로 황건(黃巾) 봉기에서 군벌의 혼전을 거쳐 삼국이 정립된 후 조(曹) 씨와 사마(司馬) 씨들 간의 권력 다툼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거의 1백년이란 기간 동안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해 부정하는 관념이 싹 텄고 다시 인생무상의 운명을 탐색하게 된 것이다. 귀하면서도 짧은 인생을 돌아보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고.

 

실제 동한 화제(和帝) 때부터 외척과 대신들이 권력과 이익을 다투기 시작해 위진 시대에 와서 명사들이 살육당하면서 사회는 피비린내로 얼룩졌다. 이때에 첫 번째 사상 해방 운동이 관념의식 영역에서 싹이 튼다. 도교의 흥기와 불교의 전래, 사상적 발전에 따라 조조(曹操)의 “불충불효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사상이나 혜강, 완적의 ‘명교’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 생겨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비록 유교사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유교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했다. 이것은 중국인들 사상의 첫 번째 해방이요 전환점이라 평가 받는다. 위진풍도를 시작으로 유교와 도교가 서로 보충하고 보완하는 사대부 정신은 중국 지식인들의 인격 형성에 근본이 되는 기초를 마련했고 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위진풍도가 인격 실천에 있어 병폐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 조류만 쫓고 혜강이나 완적과 같이 우국우민의 정신이 결여된 것도 확실하다. 그러면서 그저 이치로 이해시킬 수 없는 괴벽만을 모방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노신(魯迅)도 “동진(東晋) 이후 작위적인 사람이 많아졌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고서는 ‘산발(散髮)’하였다고 말하면서 럭셔리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맑은 정신일 때 독서를 한다면서 묵으로 입술을 발라 방금 많은 글자를 썼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도 나타났다. 내가 보기에 큰 옷을 입거나 나막신을 신거나 산발하는 것 등등 후세에 본뜨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저 그런 형태만 본뜬 것으로 이론의 제창과는 실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청담(淸談)으로 망국을 초래했다는 관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청담은 위진 현학(玄學)이 성행했던 특수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다.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이다. 역사적 관점으로 그것을 연구하고 인식해야만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터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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