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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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이 섬동도(陝東道) 행태(行台)를 역임할 때 고조 이연은 그에게 관할지 내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세민은 관할지역 내의 전지(田地)를 전쟁에 공이 있는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에게 하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장첩여(張婕妤)도 자기 아버지를 위해 그 전지를 주도록 이연에게 요청했다. 고조는 그 전지를 장첩여의 아버지에게 하사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런데 이신통은 진왕 이세민이 자신에게 먼저 전지를 하사했다고 내놓지 않았다. 이 일이 장첩여를 화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 장첩여가 이연을 모시게 되자 “황상께서 우리 아버지에게 상으로 내린 토지를 진왕이 뺏어 이신통에게 줘 버렸습니다”라고 이간질했다. 이연은 대노하여 이튿날 이세민을 불러 소매를 쓰다듬으면서 “내 손이 내린 조서는 통하지도 않고 네가 내린 명령은 주현(州縣)에서 실행된다고. 내 체면은 어찌 될까?”라며 책망했다. 그리고 이세민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면서 대신 배척(裵戚)에게 “이 녀석은 밖에서 늘 병사들과 함께 있더니 전제적인 기풍이 몸에 배었어. 모두 이놈과 같이 있는 모사들이 잘못 가르친 거야. 내 과거의 아들과 같지 않게 돼 버렸어”라고 했다.
이후 후궁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연에게 “황상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진황의 뜻대로 되면 우리들과 아이들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뿌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태자는 사람됨이 관대하고 자상하여 분명 우리들을 돌볼 것입니다”고 했다. 고조 이연이 듣고는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후궁들이 이간질을 하기 시작하자 이연은 점차 이세민과 거리를 두고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신뢰를 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기 위해 이건성과 이세민 모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서로의 담벼락 밑을 파들어 갔다. 회유하지 못하면 배제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세력을 잘라냈다. 둘을 비교하면 이세민이 이건성보다 성공을 많이 거뒀고 손실은 적었다. 이건성이 이세민의 장수 위지경덕에게 비밀리 편지를 보내 회유하는 뜻을 알리면서 금은보화를 한 수레 가득 실어 보냈다. 하지만 위지경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성은 또 금은으로 이세민의 다른 용장 단지현(段志玄)을 유인했으나 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은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 세 형제가 고조 이연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 고조는 그들에게 말을 타고 활쏘기 시합을 하라 명했다. 이건성은 고의로 이세민에게 길들이기 힘든 사나운 말을 주었다. 이세민은 서너 번 연거푸 실패하고서야 어렵사리 그 말을 길들일 수 있었다. 이세민은 옆에 있던 우문사급(宇文士及)에게 “그들이 기회를 틈타 날 죽이려 하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 날 해칠 수는 없지”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건성은 후궁들을 통해 이연에게 “진왕이 자신에게 천명(天命)이 주어졌으니 분명 천하를 얻을 것이요. 어찌 나를 쉽게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연이 듣고 대단히 화를 내면서 이세민을 불러 들여 “천자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다. 머리만 믿는 개인이 사사로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너무 급하구나”라며 질책했다. 이세민은 부득불 모자를 벗고 고조에게 죄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세민을 동궁으로 불러 연회를 열었다. 기회를 봐 이세민을 독살하려 했다. 이세민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배를 들고 건배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이세민이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를 토했다. 다행히 회안왕 이신통이 현장에 있어 급히 이세민을 서궁(西宮)으로 데리고 가 긴급히 치료를 해서야 이세민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후 고조는 이세민의 병세를 보기 위해 서궁으로 가고 나서 아들들이 함께 술을 마신 상황을 알게 됐다. 이건성에게 “진왕이 술을 마시지 못하니 이후에는 밤에 같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마디 건넸다.
결국 고조 이연은 이세민에게 “너희들 형제가 불화가 심해 한 명은 동궁에 한 명은 서궁에 거주하는 게 불안하구나. 너무 가까이에 있어. 내가 보기에 네가 낙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수(河水), 낙수(洛水)의 동쪽 지역을 네가 다스리고. 네 의견은 어떠냐?”라고 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 소식을 듣게 됐다. 이세민이 만약 낙양으로 떠나면 이후에 그를 제거할 기회가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건성과 이원길은 돌권(突厥)과 당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는 기회를 틈타 이세민의 병권을 빼앗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이세민을 제거하고. 이건성은 이원길에게 이세민의 부하 장수 위지경덕, 진숙보(秦叔寶) 등과 함께 출정하도록 제안했다. 고조 이연이 동의했다.
바로 이때 왕질(王眰)이 비밀리에 이세민에게 “태자가 제왕에게 한 말입니다. 현재 네가 진왕의 정병들을 얻어 수 만 병사를 거느리게 됐구나. 내가 진왕과 함께 곤명지(昆明池)에서 네 송별식을 거행할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 병사들에게 진왕을 죽이도록 해라. 그리고 황상에게 진왕이 급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면 황상도 어쩔 수 없이 믿을 것이다”라고 급보했다. 이세민은 놀라 즉시 장손무기, 고사렴(高士廉), 위지경덕 등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방현령(房玄齡), 두여회, 장손무기 등이 이세민에게 정변을 일으키자고 권했다. 선수를 쳐 주도권을 잡고 이건성, 이원길을 주살해야 한다고. 이세민도 정변을 일으키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덕 6월 3일 이세민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조정에 나가 이연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의 여러 가지 불법 행위를 고했다. 그들과 후궁들의 정당하지 못한 관계도 알렸다. 그리고 고조에게 “저는 형제들과 인정을 저버리는 행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태자와 제왕이 저를 모해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의 음모가 성공하면 저는 영원히 부황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연이 듣고 놀라 이튿날 조정에서 그 일을 심리하기로 했다. 후궁 장첩여가 이세민의 움직임을 듣고 즉시 사람을 보내 이건성에게 알렸다. 이건성은 바로 이원길을 찾아 상의했다. 이원길이 “빨리 군대를 모집하고 병을 핑계 삼아 조정에 나서지 마십시오. 먼저 동정을 살피고 나서 다시 움직이시지요”라고 제안하자 이건성은 오히려 “겁낼 게 뭐 있어. 이곳에는 내 군대가 지키고 있는데 그들이 어쩔 수 있겠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건성과 이원길은 현무문으로 들어갔다.
정변 이후 이세민은 즉시 위지경덕을 보내 고조 이연에게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당시 이연은 배적(裵寂) 등 몇몇 대신들과 태극궁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아연실색할 밖에. 나중에 이연은 일이 이미 결정돼 돌이킬 방법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묵인했다. 현무문 사변이 일어나고 3일 후 당고조 이연은 진왕 이세민을 태자에 앉히고 국가의 모든 정무를 처리하게 한다고 선포했다. 그해 8월 이연은 퇴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이 됐다. 이세민은 동궁 현지전(顯志殿)에서 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당태종이다.
골육상잔의 비극을 연출한 아버지 이연은 어떤가? 이연은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세민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반대했다. 황제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세민을 태자로 앉히지도 않았다. 한 쪽 눈을 감고 소극적으로 아들들의 불화에 대처했다. 아니 수수방관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황위 계승이 왕조의 중대사인데도 우유부단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태자 이건성이 최대의 위협이 되는 동생 이세민에게 해를 가하려는 나쁜 생각을 갖게 했고 이세민으로 하여금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한 야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연은 아들끼리 갈등이 격해져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동궁과 서궁으로 나누어 같이 살게 하면서 이루지도 못할 균형을 애써 맞추려 했다. 심지어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일임되는 전제주의 국가를 경영하는데 지주처럼 토지를 동서로 양분해 두 형제에게 경영케 했으니. 어찌 전제주의 국가에서 두 임금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조치는 갈등을 격화시키는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었다. 이건성은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형국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고 이세민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렸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게 됐다.
누구의 탓일까? 황위를 찬탈하려는 투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몬 인물은 누구일까? 결국 형제끼리 피를 볼 수밖에 없는 목불인견의 참극 ‘현무문 사변’은 아들들의 아버지인 이연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터이다.
사실 ‘현무문 사변’이 이세민이 권력을 향한 야심에서 일으킨 것인지 이건성이 이세민에게 해를 가해서 일어난 정변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형제끼리의 전쟁은 봉건 황권 중심의 전제주의 사회에서 황위를 두고 벌어졌던 여러 참극과 본질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3천년 동안 이어져온 중국 봉건주의 사회가 불러온 궁정 정변의 하나이기에.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이세민이 황위에 오른 후 성당(盛唐)의 기상이 출현했다. 하지만 형제끼리의 핏빛은 어찌 지울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