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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역사서에 제갈량은 “팔척장신으로 마치 송백처럼 용모는 매끈하면서도 컸다”고 했고 ‘출중한 재능’과 ‘웅대한 도량’을 겸비했다고 묘사돼 있다. 이런 절찬을 받을 정도라면 그에게 구혼을 하는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미남자는 현지 면남(沔南) 명사인 황승언(黃承彦)의 여식 ‘아추(阿丑)’와 혼인한다. 그녀는 “마르고 새까맸으며 머리카락이 누렇다”고 전한다. 당시에도 “공명이 아내를 고른 것은 배우지 마라, 추녀만을 고를 뿐이니”라고 웃음거리가 됐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왜 추녀를 아내로 맞이했을까?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관점은 제갈량이 재능을 중시했지 용모를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아추’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재능과 식견이 남달랐다고 한다. 명문가 출신이라 제갈량과 의기투합했다고도 하고. 두 사람이 결합한 후 아추는 남편을 위해 적극적으로 계책을 마련해 줬다. 이는 제갈량에게 영감을 주는 등 도움이 됐다. 제갈량은 아추와 같은 현모양처를 맞이하려 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고 했다.

 

 

 


최근에 곡량(谷亮)과 진청(陳靑)과 같은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제갈량이 아추와 결혼한 것은 심사숙고 끝에 내린 남다른 일이라 본다.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봤다. 여자 쪽의 명문세력이 자신의 출세를 도울 것이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살림살이가 빈한했다. 문벌도 별로였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고 남창(南昌)에서 예장(豫章)태수를 지내는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따라가 살았다. 소년 시기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호족의 압제를 경험했다. 14세 때 숙부는 관직을 빼앗기고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제갈량이 17세가 됐을 때 숙부가 죽자 양양(襄陽)성 서쪽 20리에 있는 융중(隆中)에 자리를 잡는다.

 

제갈량은 시골에 있었으나 하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하게 평생 은거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입신출세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큰 공을 세울 원대한 꿈도 있었다. 정치무대에 올라 공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국가의 성쇠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갈량은 여러 가지 곤경을 헤쳐 나갔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도 했다.

 

먼저 그는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삶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많은 책들을 읽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당시 중원은 전란에 휩싸였고 강동은 분쟁이 일어났다. 형주(荊州)는 위로는 파촉(巴蜀)과 통하고 아래로는 강동과 이어져 정치적 전략적 요지였다. 역사적으로 반드시 점령해야할 요충지였다. 당시에는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있어 피난처가 됐다. 중원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자 젊은 제갈량은 그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남양군(南陽郡)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한 왕실을 중흥시킨 발상지였다.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황제의 고향에 머물면서 제업을 생각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계통적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공부했다. 더불어 어릴 적부터 황제의 은혜에 충성을 다한다는 전통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점차 충군보국의 정치 주장을 세워나갔다. 온힘을 다해 형주의 지주 계급과 관계를 맺으면서 “조조(曹操)는 나라 도적이고 손권(孫權)은 정권을 뺏으려 한다”고 보고 그들을 섬기려 하지 않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공경한 태도를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재능과 학식도 남달랐다. 그래서 형주 지주 집단 중 거물인 방덕공(龐德公), 황승언 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제갈량은 이러한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혼을 모색한다. 그는 자기뿐만 아니라 집안의 혼인에도 고심했다. 먼저 그는 누나를 방덕공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방덕공은 형주의 지주 집단 중 상양 지역의 명망 있는 수령이었다. 제갈량을 극진하게 대했고 높이 평가했다. 제갈량을 ‘와룡(臥龍)’이라 부를 정도였다. 제갈량은 그렇게 형주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후 제갈량은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위해서도 명문 규수를 간택하는데 남양 명가 임(林) 씨의 여식이었다.

 

후일을 도모하는 게 중요했다. 자기 자신도 부인을 선택하면서 형주에 머무르는데 후광이 있어야 했고 명망 귀족과 사귀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황(黃) 씨의 추녀와 결혼을 한다. 알아 둬야 할 것은 황 씨의 아버지인 황승언은 면남의 명사였다. 또 형주 지주 집단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추녀를 처로 맞이한 제갈량에게는 최소한 3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 장인인 황승언은 현지에 상당히 명망이 있어 제갈량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둘째, 장모 채(蔡) 씨와 유표의 후처는 자매였다. 황 씨 집안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유표라는 황족과 친척이 되는 것이다.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기를 바라던 제갈량이 그런 이점을 놓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셋째, 두 명의 누나를 시집보낼 때 제갈량은 남녀의 감정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외모는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황승언이 제갈량에게 결혼에 대해 물을 때 즉석에서 장인어른이라 부르며 감사를 드렸다. ‘아추’의 얼굴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부터 제갈량이 지주 집단에 들어서는데 ‘파란 등’이 켜지게 된다. 엥겔스가 “결혼은 정치적 행동이다. 새로운 온인 관계를 핑계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는다”고 한 말과 똑 같다.

 

제갈량의 혼인 관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은 사람도 있다. 정치적 이익 이외에 풍속습관도 제갈량의 혼인 태도와 동기를 탐구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예부터 ‘현모양처’는 짝을 구하는 전통적 중심 관념이었다. 남편이 집안을 세우는데 처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성이 재덕을 갖추었냐는 것을 중시하고 용모는 다음이었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할 수 없을 때 재능이 우선인 셈이다.

 

미모를 본다면 처보다는 첩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첩이 남자로써 좋아하는 여성의 유형인 것이다. 처 이외의 여성들은 용모가 남자를 이끄는 ‘무기’가 되는 셈이다. 제갈량도 나중에 첩을 두었다. 그렇다면 처는 재능이 우선이요 첩은 용모가 있으면 된다는 중국 전통 관점을 제갈량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사람들은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흠모하는 제갈량이 일반적 관념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량도 사람이다. 성인군자라고 추앙만할 필요가 없다. 추녀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일면도 있으나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인의 면모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추녀와 결혼을 한 동기가 무엇일까에 대해 의론이 분분하다. 다만 제갈량은 혼인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자신의 앞길을 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녀도 마다하지 않은 제갈량을 그저 자신의 장점인 정치인으로써의 지혜라고 보면 어떨까?

 

사실 여성은 외모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이요 마음이요 재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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