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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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연(趙飛燕 : ? - 기원전 1),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다. 춤과 노래를 잘했고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날아가는 제비처럼 가벼워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고 해서 ‘나는 제비’라는 뜻인 ‘비연(飛燕)’으로 불렸다. 성제 때 입궁해 첩(婕)이 됐다가 나중에 황후가 된다. 평제(平帝) 즉위 후 서인(庶人)으로 전락하고 전전하다가 자살했다. 고대 중국 한나라를 대표하는 미인으로 일컬어지지만 악행과 문란한 행위로 오점을 남겼다.
조비연은 한나라 성제 유오(劉鷔)의 두 번째 황후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쌀쌀하면서도 고왔다고 한다. 춤 솜씨가 절묘해 누이동생 조합덕(趙合德)과 함께 소의(昭儀)에 봉해졌고 10년 동안 성제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렇게 많은 궁녀 중에서 조비연은 어떻게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을까?
먼저 조비연의 가족부터 이야기해 보자. 조비연의 아버지 조임(趙臨)은 한나라 궁정의 가노로 매우 궁핍했다. 조비연이 태어나자 부양할 수 없어 아버지는 황야에 버려 버렸다. 밤에 조임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어린 아이의 꿈을 꾸고 나흘 후 찾아가보니 그때까지도 살아있었다. 조임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와 키웠다. 조비연은 가난 때문에 어릴 적에 양아(陽阿)공주에게 팔려가 가희가 됐다. 천부적 재능을 갖춘 조비연은 매혹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춤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성제가 하루는 미복으로 출행해 양아공주의 집으로 갔다. 공주는 가희들을 불러 성제를 대접했다. 조비연의 넋을 빼는 눈매,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노랫소리, 유연하고 감미로운 춤 솜씨는 성제를 매료시켰다. 성제는 조비연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조비연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때로는 먼저 양보하라는 ‘욕금고종(欲擒故縱)’의 계책을 십분 발휘한다. 황제의 부름을 세 번이나 거절하며 성제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나서야 허락하는데, 이후 성제는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다.
조비연의 수려한 용모와 유연한 몸매, 출중한 춤 솜씨는 후궁의 빈비(嬪妃) 중 군계일학이었다. 그녀가 추는 춤의 스텝, 꽃을 든 듯 가볍게 떨리는 손, 바람처럼 살며시 흔들리는 몸매는 성제를 미혹에 빠뜨렸다. 성제는 그녀를 위해 궁궐 태액지(太液池)의 영주(瀛洲) 정자에 무대를 설치했다. 성제는 옥환(玉環)으로 장단을 맞추고 풍무방(馮无方)은 생황으로 반주했다. 조비연은 『귀풍송원곡』에 맞춰 춤을 췄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조비연을 못 가운데로 날려 버렸다. 다행히 풍무방이 그의 치마를 붙잡아 구했고.
그럼에도 비연은 그 상황에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고 임금의 손바닥위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물 찬 제비, 또는 나는 제비’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이때 조비연이 물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발목을 급히 붙잡다가 치마폭의 한쪽이 길게 찢어지게 됐는데 이렇게 찢어진 치마는 오늘날 중국 여인들의 전통 의상인 유선군(留仙裙)의 유래가 됐다고도 전해진다. 성제는 궁녀들에게 수정반을 들게 하고 조비연이 그 위에서 춤을 추니 춤사위가 절묘해 성제가 더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조비연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씀씀이도 치밀했다. 성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녀보다 용모가 더 뛰어난 누이동생 조합덕을 성제에게 추천했다. 성제는 조합덕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합덕의 부드러운 마음씨는 더더욱 성제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였고. 성제가 조 씨 자매를 보지 않으면 심신이 불안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성제는 조 씨 자매의 말을 절대 신임하게 됐다. 조 씨 자매는 허(許)황후를 함정에 빠뜨려 폐위케 하고 조비연은 황후가 조합덕은 소의가 됐다. 조 씨 자매가 후궁의 권력을 장악한 후 생사여탈권을 쥐고 한 시대를 풍미한다.
조 씨 자매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나 임신하지 못했다. 다른 빈비들이 아들을 낳아 황후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돼 궁녀들을 학대하고 주살한다. “아들을 낳은 자는 즉시 주살하고 수도 없이 유산을 시켰다.” 당시 민간에는 “제비가 날아와 황손(皇孫)을 쪼아 먹는다”는 동요가 유행할 정도였다. 궁녀 조궁(曹宮)이 남자 아이를 낳자 주살 당했고 황자도 궁 밖으로 버려졌다. 허(許) 미인이 아들을 낳자 조합덕이 울고불고 하여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미색에 빠진 성제는 불혹의 나이가 돼서도 자식이 없었다. 조 씨 자매를 위해 두 번이나 아들을 죽였으니 강산과 사직을 돌보지 않은 군주의 대명사가 됐다. ‘미인을 사랑하여 강산을 돌보지 않은’ 판본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 씨 자매는 왜 임신하지 못했을까? 그녀들은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배꼽에 환약을 붙였다. 이 환약의 약효는 대단했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했으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청춘을 간직케 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향기는 성제를 더더욱 자제할 수 없게 만들어 운우지정을 나누지 않으면 미칠 지경에 빠뜨렸다. 조 씨 자매는 성제를 단단히 옭아매면 맬수록 성제의 정력은 고갈됐고 그러면 약을 조제해 복용시키면서 음욕을 만족시켰다. 성제의 쾌락을 위해 방사들은 단약을 조제해 바쳤다. 성제가 단약을 복용하면 정신이 극도로 흥분돼 미인을 가까이 할 수 있었으니. 청춘이 회복된 듯 보였다. 그러나 장기 복용하게 되고 복용량을 늘리면서 죽음에 이르게 됐다.
성제는 조합덕의 침대에서 죽자 조야가 진동했다. 조정 대신들은 조 씨가 재앙의 근원이라 성토했다. 조합덕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대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고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다.
조비연은 한 성제의 조카 유흔(劉欣)의 즉위를 도우면서 새로운 황제의 은혜를 입어 황태후 자리를 보존했다. 6년 후 애제(哀帝)가 죽자 대사마 왕망(王莽)은 황손을 살해한 죄를 지었다며 조비연을 자진토록 했다. 잠시 동안 영광을 누린 조비연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가희의 신분에서 황후의 보좌에 오른 것을 기회로 삼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제의 호색 심리에 영합한 결과였다.
성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누이동생 조합덕을 바쳤고 성제의 음심을 유혹하기 위해 환약을 사용했으며 성제의 성욕을 위해 춘약을 대대적으로 복용하게 했다. 자신은 노래와 춤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성제를 미혹시키고 황후를 함정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후손을 주살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천하를 횡횡했으나 결국은 횡사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후 ‘연수환비(燕瘦環肥)’라 하여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상징되고 당나라 때 현종의 비로 호사스러운 사치를 누렸던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의 전형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은 불행하게 마감한다. 미인박명일까? 아니면 자업자득일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