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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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후(呂后 : ?-기원전 180년),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娥姁)’로 진나라 말기 단부(單父 : 현 산동성 단현[單縣]) 사람이다. 한 고조 유방(劉邦)의 정처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황후에 봉해졌다. 강인하고 속궁리가 깊으며 임기응변의 계략에 능했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다. 유방을 도와 개국공신들을 주살했다. 혜제(惠帝)가 즉위하고 태후에 봉해진 후 권력을 독차지했다. 유 씨의 여러 후왕(侯王)을 잔인하게 주살하고 여 씨들을 후왕에 봉했다. 죽은 후 여 씨들은 모두 주살됐다.
중국 역사상 여황제를 얘기하면 무측천(武則天)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서한(西漢) 시기에 한 고조 유방의 처 여후가 고조 사망 후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통치자다. 사서에 따르면 그녀의 실재 통치기간은 16년이나 된다. 그 기간 동안 ‘공신’을 주살하고 ‘척부인(戚夫人)’을 죽이는 등 수단이 잔악하고 질투심이 많으며 무정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여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역사의 진실을 알아보자.
여후, 즉 여치(呂雉)의 부친은 유방의 풍모가 일반인하고 다르다는 것을 보고 딸을 시집보낸다. 당시 유방은 평민이었기에 빈천했었다. 나중에 여치는 유영(劉盈)과 노원(魯元)공주를 낳고 농사지으며 망(芒)과 탕(碭)에 피신한 유방을 자주 찾아갔다. 초한쟁패 초기 유방의 부모와 여치는 항우(項羽)의 포로가 돼 2년여 동안 인질의 삶을 살기도 했다. 나중에 유방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됐고 유영은 태자로 옹립된 후 나중에 한 혜제(惠帝)가 된다.
여후의 통치 생애는 유방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사마천 『사기』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사람들은 여후의 첫째 잘못은 ‘공신’을 죽인 것이라 본다. 여후는 왜 한신(韓信)을 주살했을까?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에도 늘 전쟁터로 나아가 반란을 평정했다. 군국대사는 여후와 소하(蕭何)가 맡았다. 한 고조 11년(기원전 197) 정월, 한신이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된 후 반란을 획책했다. 가신들과 은밀히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여후와 태자를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여후는 장락궁(長樂宮)에서 한신을 체포하고 즉시 처결해 버렸다. 한신이 진짜 정변을 도모했는지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없지만 여후의 행위는 한 왕조의 안위를 구한 장거로 받아들였고 유방도 사실을 전해들은 후 여후를 책망하지 않았으며 신하들도 술렁거리거나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왕(梁王) 팽월(彭越)은 왜 죽였는가? 팽월은 은밀히 반란을 획책하여 한 왕조를 등지려 한다고 고발당했다. 유방은 그가 공이 있기에 사형을 면하고 서인으로 폐한 후 사천(四川)으로 유배 보냈다. 유배 도중 섬서(陝西) 화현(華縣)에서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던 여후를 만나자 여후에게 고향인 산동(山東) 거야(巨野)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여후는 거짓으로 그러자고 대답하고 그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간 후 유방에게 팽월을 주살할 것을 건의했다. “팽월은 장사로 그를 촉으로 보내면 우환으로 남을 수 있으니 주살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렇게 본다면 팽월을 주살한 이유는 유 씨 천하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사마천은 “여후의 사람됨이 강직하여 고조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신을 주살했는데 여후가 많은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여후가 후대에 가장 큰 욕을 먹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유방의 애첩인 척부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여후가 나이를 먹고 노쇠해지자 척부인이 유방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척부인의 소생인 월왕(越王) 여의(如意)도 늘 유방과 함께 관동에 머물렀다. 척부인은 누차 유방에게 유영을 폐하고 여의를 태자에 앉히도록 청했다. 유방도 태자를 바꿀 생각을 가졌으나 쉽게 태자를 바꾸면 국본을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을 염려했다. ‘대신들은 모두 유영을 위해 간언하자’ 유방은 앞에서는 윤허했지만 뒤로는 여의를 앉힐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여후는 유영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자 불안에 떨게 됐고 척부인과 원수지간이 됐다.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고 여후는 태후가 됐다. 태후가 된 후 척부인 모자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른 후 눈을 파버리고 귀를 지졌으며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말을 못하게 한 후 돼지우리에 던져 넣어 버렸다. 이른바 ‘인체(人彘 : 인간 돼지)’가 그것이다. 혜제 조차도 찾아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인, 잔인하고 악랄함이 극치다.
그런데 여후 일생의 공과를 척부인을 살해한 ‘인체’ 사건에만 국한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척부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이지만 한 왕조의 안위와는 관련이 없는 궁정 내부의 일이고 국가와 민생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본다. 청대 사학자 조익(趙翼)은 질투란 여인의 인지상정으로 척부인과 여의는 여후가 가장 질투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외에 객관적으로 보면 여후의 일생은 한 왕조와 중국 역사에 공헌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방이 죽은 후 정권은 실재 여후의 수중에 있었다. 즉위한 혜제는 몸이 약해 정치를 할 수 없었고 혜제가 죽은 후 혜제 후궁의 아들을 황제로 앉혔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후는 죽을 때까지 정치를 농단했다. 여후가 통치하는 16년간 소하, 조참(曹參), 왕릉(王陵),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 개국공신을 중용하여 한 왕조의 통치를 유지했다. 그래서 『사기』는 여후를 「본기」에 그녀의 일들을 기록했다.
여후가 한 가장 큰일은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황로(黃老)의 술(術)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여후는 소하, 조참에게 정사를 맡기고 무위로써 다스리고 백성의 바람을 쫓아 정치를 하니 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① 법을 너그럽게 넓혔다. 중상층 공신들이 범법해도 감옥에 가지 않도록 했다. ② 감형을 실행했다. ③ 속죄법을 반포했다. ④ 관리와 서민을 방해하는 법령을 방지하고 협서율(挾書律)을 폐지했다. 이때부터 관리와 서민들은 자유롭게 『시』․『서』․『예』․『역』․『악』․『춘추』등 역사문화 전적을 볼 수 있게 됐다. 진나라 말기부터 깊이 숨겨두었던 고서들이 세상에 나오게 됨으로써 한나라 초기 문화부흥의 단초가 됐다. ⑤ 삼족을 벌주는 제도를 없앴다. ⑥ 상업의 율령을 느슨하게 했다. 즉 공상 자유의 경제 정책을 실행했다. 이런 ‘무위이치’와 법제 개혁의 결과 사회 경제의 발전을 가져왔다. 여후가 정권을 장악한 16년 동안 “천하는 평안해 졌고 형벌을 희소해 졌으며 죄인은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농업에 힘써 의식이 풍족해 졌다.” 즉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위한 튼튼한 기초를 닦게 된 것이다.
여후는 생전에 여 씨의 자식들과 조카들을 왕으로 봉했다. 그녀가 집권한 후 불안을 느껴 그렇게 했다고 평가한다. 자신에게 후손이 없기 때문에 유 씨의 자손들이 권세를 잡고 여 씨들을 능멸할 것을 염려한 것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최후는 참담하다. 여 씨가 죽고 나서 여 씨의 여러 왕들은 한 왕조의 대신들에 의해 멸족됐다. 국가 경영에 공은 있다고 하나 자신이 주살한 인물들의 영혼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나 보다. 인과응보일지니, 죽은 후의 일이라 안위할 것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