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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연의』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간절하게 현인을 찾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이 자기를 도와 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 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가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현자나 재능이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유비의 삼고초려는 현자를 간절히 구하고 인재를 중용하는 본보기가 됐다. 삼고초려에 관해서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고 제갈량 본인도 이야기 했고 『삼국연의』에도 묘사돼 있다. 당시 유비는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어 인재를 급히 구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치상 삼고초려는 가능한 일이다.

 

 

 

 

『삼국지․제갈량전』에 유비와 제갈량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유비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서(徐庶)가 유비를 보고는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은 현명한 자로 와룡(臥龍)입니다. 그를 만나보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유비는 “당신이 그를 데리고 와 보십시오”라고 하자 서서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수는 있으나 그를 여기에 왕림해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유비는 친히 제갈량이 머물고 있던 곳으로 배움을 청하러 갔다.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같이 갔다는 기록은 없고 모옥(茅屋)에서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제갈량은 그의 『전출사표』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세 번씩이나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응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삼고초려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제갈량은 원래 원대한 뜻을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비가 초빙했다면 제갈량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제갈량이 허세 부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쳤다면 자신의 정치적 희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게 아니겠는가? 당시 제갈량은 27살의 청년에 불과했다. 명망이 있는 정치가인 유비가 어찌 굽실거렸겠는가? 그리고 서서 등과 같은 사람의 칭찬만 듣고 일개 무명소졸이며 어린 제갈량을 찾아갔다는 것은 어딘지 황당하지 않은가?

 

당시 유비는 조조의 수십만 대군의 남정에 위협받고 있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해서 나눈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문장 『융중대(隆中對)』에는 초미지급(焦眉之急)한 상황은 하나도 묘사돼 있지 않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 「융중대책」에는 초미지급의 현실 문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반대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앉아 세상일을 논하고 그들의 대화를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형주의 군대는 완(宛), 낙(洛)으로 진군하고”, “익주의 군대는 진주(秦州)에서 모으고” 등등을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가만히 앉아 조조의 군대가 쳐들어오길 기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와 동시에 유비가 처음 제갈량을 만날 때 현장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융중대』등은 후인이 『출사표』중의 삼고초려 설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조작한 것이라 본다.

 

 

 

 

삼국 시대 어환(魚豢)이 쓴 『위략(魏略)』에는 유비가 처음 제갈량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돼 있지만 ‘삼고초려’는 아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비는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는 조조가 황하 이북을 통일한 때였다. 제갈량은 조조가 형주를 공격할 것으로 예견했다. 형주의 유표(劉表)는 유약한 사람이고 군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인물이기에 쉽게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비가 처음 제갈량을 만났을 때 너무 젊어 여러 유생처럼 대했다. 제갈량이 당시의 형세를 얘기하고 대책을 얘기하자 그제야 유비는 냉담한 태도를 바꾸고 제갈량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상객으로 예를 했다.” 서진(西晉) 사마표(司馬彪)의 『구주춘추』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제갈량 평생의 성격으로 볼 때 『위략』이나 『구주춘추』에 기록된 것처럼 제갈량이 직접 유비를 찾아갔을 가능성이 많다. 『위략』은 당시 사람들이 당대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성에 대해서 그리 의심할 필요는 없는 사료다.

 

삼고초려는 미담이다. 제왕만이 아니라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어진 사람과 현명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유비와 제갈량의 군신의 도리는 후세에 전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봉건적 군신의 도리에 국한시키고 과대 포장해 봉건통치에 의한 모순과 오류를 덮을 의도가 있다면 과감하게 이 미담을 버려야 한다. 5천년 동안 제왕에 의한 전제 통치는 동양사회에 씻을 수 없는 모순을 쌓아 놨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그렇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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