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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사형(死刑)은 범죄자의 생명을 빼앗는 형벌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형벌의 종류는 무척 많았다. 『상서․대우모』에 “형벌(의 목적)은 형벌이 없어지는 것을 기대한다(刑期於無刑)”라 하였고 『국책․조책』에는 “스스로 형벌을 줌으로써 용모까지 변하게 하였다(自刑以變其容)”는 기록이 있다. 형벌이 원시사회에서 비롯됐는지 노예사회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직까지 정론이 없다.

 

형벌이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 국가를 관리하는 극단적 수단의 하나로 필수 불가한 것이다. 각 나라마다 형벌이 다르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사형’이라는 오래된 형벌 제도를 가지고 있다. 범죄자의 생명을 빼앗는 형벌을 생명형, 극형이라 하기도 한다. 법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고대의 사형은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예를 들면, 戮(육), 炮烙(포락), 脯(포), 磔(책), 烹(팽), 焚(분), 車裂(거열), 體解(체해), 斬(참), 梟首(효수), 棄市(기시), 定殺(정살), 絞(교), 賜死(사사), 陵遲(능지), 族誅(족주)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수단이 너무 잔혹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이런 사형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요순시대라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노예제사회라 분류되는 하(夏)왕조가 출현하여 나름대로 국가적 체계가 갖춰진 시기에 사형이 제정된 것인가? 법학자들은 아직까지도 논쟁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시사회에서 각 부락 사이에 전쟁이 빈번했는데 전투 중에 적대하는 다른 부족사람들이나 포로들을 살해하게 되고 이런 살육의 수단이 ‘형벌’이나 ‘처벌’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형을 범죄자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라 정의를 한다면 중국은 원시사회에서부터 이미 사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학자들은 사형이 생겨난 시대를 요순시대라 한다.

 

사형은 ‘오형(五刑)’ 중 하나다. 중국 고대에 법률에 이미 규정된 5종류의 형벌을 ‘오형’이라 하고 조기 ‘오형’과 후기 ‘오형’으로 나뉜다. 전자는 墨(묵), 剕(비), 宮(궁), 劓(의), 大辟(대벽)이고 후자는 笞(태), 杖(장), 徒(도), 流(류), 死(사)가 그것이다. 『상서․요전』에 ‘오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순(舜)이 고도(皐陶)에게 중원을 침범하는 만이(蠻夷)의 외족에 대해 ‘오형’을 시행하여 그들을 길들이자고 건의를 한다. 이에 순과 우(禹)가 집권한 시기에 살았던 고도가 ‘오형’을 만든 사람이라 한다. 또 그는 중국 상고시대 최초의 법학자이면서 법관의 비조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오형’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순과 우 시대의 ‘오형’은 鞭(편), 撲(박), 金(금), 流(류), 賊(적)으로 전기의 ‘오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상서․여형편』[※‘상서’는 후대에 위서라 판명됐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 둬야 한다]의 기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묘족(苗族)에게 화살을 돌린다. 삼묘(三苗 : 묘족의 옛 이름)의 통치자들은 신을 숭배하거나 무술(巫術)로써 통치 수단으로 삼고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오형’이 원시시대 말기에 발생했고 묘족들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은 현재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듯 ‘오형’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오형’ 중에 사형은 꼭 들어있었다. ‘대벽’이든 ‘적’이든 단지 명칭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오형’이 출현한 시대 차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법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순임금 시기에 이미 사형이 출현했다고 보고 있다. 이외에 『상군서․화책』기록에 따르면 황제(黃帝)시기에 이미 도거(刀鉅)의 형벌이 시행됐다고 한다. 그리고『상서․고도모』기록에 보면 오제(五帝)시기에 이미 ‘有邦(유방)’, ‘兢兢(긍긍)’, ‘業業(업업)’, ‘一日(일일)’, ‘二日(이일)’의 다섯 가지 사형이 있었다고 한다. ‘유방’은 후대의 화형에 해당하고 ‘긍긍’은 창끝으로 목구멍을 찔러 죽이는 형벌이고 ‘업업’은 죄인의 근육을 자르는 즉 우리가 얘기하는 천참만륙이며 ‘일일’은 범인을 나무에 묶고 사지와 머리를 자르는 것이고 ‘이일’은 범인을 나무에 묶어 천천히 죽을 때까지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사형에 대해 재미있는 연구가 있다. 법학가인 채구형(蔡柩衡)은 『중국형법사』에서 음운학, 고고학의 시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원시사회는 민풍이 순박하고 인성이 선량해서 교화하기 쉬웠기 때문에 우순시대에 범죄행위에 대해 때리거나 쫓아내는 징벌을 내리면 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무슨 사형이라든가 육형은 없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상군허․화책』에 “신농의 시대에 형벌이 필요 없이 다스렸다.”고 하였고 『노사․전기』8권에 “형벌이 시행하기도 전에 백성이 교화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형벌이란 현재의 형벌이라는 말의 의미와 다르고 단지 사형과 육형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또 다른 학자는 원시사회에 ‘사형’이란 명칭이 존재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원시사회의 이른바 ‘사형’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형이라 볼 수 없다고 보았다. 원시사회의 사형이란 각 부족 사이에 복수하는 수단으로 혈족 복수의 형태로 다른 부족에 대해서만 사용하였고 동족끼리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씨족이나 부족의 어떤 구성원일지라도 해를 끼치면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씨족이나 부족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구성원이 밖에서 능욕이나 상해를 당하면 그 씨족이나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침범한 자가 소속된 씨족이나 부족에게 집단 복수를 하는 것이 혈족 복수다. 사형과 혈족 복수는 그 근원이 비슷하거나 어쩌면 사형이란 혈족 복수에서 변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혈족 복수란 진정한 사형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사형을 형법의 구성 성분으로 보고 형법은 계급,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나 생겼다고 본다. 하(夏)나라가 성립하기 이전에 살인이라는 형을 집행한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원시사회 시기에는 국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고 더욱이 형법체계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이기에 사형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라가 시작되고 나서 국가 건설과 형법체계의 출현이 점차 갖추어지기 시작할 때서야 비로소 형벌이라 부를 수 있는 ‘사형’이 생겼다고 본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한비자․식사편』에 하나라 우왕이 회계(會稽)에서 각 제후의 군주를 소견하면서 방풍군(防風君)이 늦게 참석하자 사형에 처한 일이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형법체계인 ‘하나라 형벌 3천조’는 하나라 사법 실행 과정에서 귀납해서 엮은 죄명의 모음으로 그중에 ‘대벽이백’이 포함돼 있다. 

 

사형을 법률 징벌 수단의 하나이지만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법률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 보완관계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 중국 법률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관건은 법률이란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야 만들어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설기휘(薛其暉)는 원시사회 말기 우순(禹舜)시대에 당시 국가가 아직 형성이 되지 않았지만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는 사유제가 출현했고 계급 분화도 점차 형성되는 시기라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습의 기초 아래 이미 강제성이 있는 규범이 출현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법률이라 하였다. 이와 동시에 처벌 수단인 형벌도 출현하였으며 대체적으로 육형, 유형, 사형 등 세 종류로 나뉘었다고 하였다.

 

『요전』에 ‘오복삼취(五服三就)’가 기재된 것으로 보면 당시 다른 사람, 다른 범죄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형벌을 채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원시사회의 법령 규제는 상당히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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