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계열사인 한국공항(주)이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2년여 4수를 거치는 도전 끝에 가까스로 도의회 상임위 통과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본회의 직전 박희수 의장이 꺼낸 ‘직권 상정보류’ 카드에 가로 막힌 것이다.
한국공항(주)의 먹는샘물용 제주지하수 증산 도전은 이제 박 의장 임기 내(내년 6월)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으로 이동했다.
제주도의회 박희수 의장은 28일 오전 10시 의사당 3층 의원휴게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공항(주) 지하수개발·이용시설 변경허가 동의안’을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제2차 본회의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된다.
박 의장은 “사기업(한진)의 제주지하수 증산에 대한 도민여론은 여전히 부정적일 뿐 아니라 찬·반 양론이 팽팽한 상황에서 표결을 강행할 경우 도의회 역시 분란에 휩싸일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직권 상정보류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앞서 환경도시위원회에서는 지난 26일 ‘한국공항(주) 지하수개발·이용시설 변경허가 동의안’을 상정해 수정 가결했다.
당초 한국공항은 자사제품인 제주퓨어워터 생산·판매를 위해 지하수 취수량을 현행 1일 100톤(월 3000톤)에서 1일 200톤(월 6000톤)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환경도시위원회는 1일 120톤(월 3600톤) 규모로 대폭 축소해 의결했다.
과거 이미 허가를 받았던 물량을 ‘환원’하는 것이라는 게 한국공항(주)측의 주장이었지만 상임위는 1일 20톤, 한달 600톤의 물량에 대한 추가 증량만 허용한 것이다.
소량이지만 취수량을 늘려주면서 항공기 좌석난 해결을 비롯해 △장학제도 확대 추진 △제주산 농축수산물 수송 물량 확대를 위한 항공화물 중형기 투입 △도민 항공료 할인 확대 등을 부대조건으로 제시했다.
또 총 취수허가량 월 3600톤 중 일반판매는 불가하고, 최대 쟁점이었던 통신판매와 관련해서는 총량의 4% 범위(현 수준) 내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한정시켰다.
그러나 이 수정동의안이 나오자 시민단체는 크게 반발했다. “사실상 제주지하수 시판을 명시적으로 허용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취수량을 늘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환도위 소속 도의원들을 향해 ‘제주지하수를 팔아 넘긴 매향노’란 거친 표현까지 나왔다.
결국 박 의장의 ‘직권 상정보류’ 카드를 꺼내들어 일단 한국공항(주)의 지하수 증산안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러나 상황은 종료된 것이 아니다. 한국공항의 지하수 증량 동의안은 현재 본회의에 계류 중인 상태로 의회 의장이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본회의에 상정, 표결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지하수 증산’ 문제에 대해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다시 높아지고 있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미 1990년대 중반 한진그룹의 창업주가 약속했고, 한국공항(주)의 전신인 제동흥산의 간부가 도의회에 출석해 도민사회를 향해 시중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도 지키지 않는데 더 이상 제주도가 끌려 다닐 이유가 있느냐”며 “지하수를 사기업의 사유재산으로 활용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맞설 수 있는 제주도의 분명한 정책과 의회의 방침이 천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제주도와 한진그룹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진그룹과 재임시절 물분쟁을 벌였던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는 본지에 연재중인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회고록을 통해 지난해 7월 “한진그룹이 자사제품을 위한 지하수 증산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제주삼다수’의 든든한 해외유통·수출 파트너가 되는 방안을 비롯해 제주도와 한진그룹이 공존·상생하는 다각적인 협력모델을 찾을 때도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진그룹 측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다음은 제주도와 한진그룹 간 '물' 문제 줄다리기 일지.
▲1984. 08 = 한진그룹 계열 제동흥산 지하수 월 3천t 취수 허가
▲1995. = 제주도, 제동흥산에 먹는샘물 제조·판매를 위한 지하수 이용허가를 하면서 '전량 수출 또는 주한 외국인에 대해서만 판매 제한' 부관(조건) 명시.
▲1996.02 = 제동흥산, 먹는샘물 부관 취소 요구 건설교통부에 행정심판 제기, 광주고법제주부에 행정 소송 제기
먹는샘물 조건부 재이용 허가 관련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제동흥산, 먹는샘물 관련 가처분 신청 취하
▲1996.09 =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신구범 지사에게 "생수 국내 시판 않겠다" 약속
▲1996.12 = 제동흥산 국내시판 금지 조건으로 지하수 재이용 허가(월 3천t)
▲1998.05 = 대법원, 제주도 지하수 이용허가 처분 중 부관취소 행정소송 기각
▲1998.05 = 제주도, 대법원 결정에도 제동흥산 먹는샘물 국내 시판 불허
▲2001 =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월 2500t으로 변경
▲2003.11 = 월 3천t으로 변경
▲2005.01 = 한국공항, 먹는샘물 '계열사 판매'로 제한한 결정이 위법 부당하다며 행정소송 제기
▲2006.12 = 광주고법, 항소심서 1심 판결(제주도 승소) 취소, 한국공항 승소 판결
▲2007.04 = 대법원, 한국공항 승소 확정 판결
▲2007.04 = 제주도, 지하수 취수량 반출량 제한, 사기업 먹는샘물 판매 금지 조치
▲2011.04 =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회,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증량(월 3천t→9천t) 동의안 상정 보류
▲2012.04 = 한국공항, 제주도에 취수량 증량(월 3천t→6천t) 허가 신청
제주도 지하수관리위원회 심의 의결, 도의회에 동의안 제출
▲2012.06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회,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증산 동의안 의결 보류
▲2012.12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회,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증산 동의안 재차 의결 보류
▲2013.02.25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회,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증산 동의안 수정 가결(하루 20t·월600t 추가 증산)
▲2013.02.28 박희수 제주도의회 의장, 한국공항 지하수 취수량 증산 동의안 본회의 상정 직권 보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