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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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은 가족 계통을 명시하는 칭호다. 『사기․굴원가생열전』에 “굴원은 이름이 平이고 초와 같은 성이다.”라고 했는데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성씨의 호칭은 대사공부터 뒤섞여 하나가 됐다.”고 했다.
한 고조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가 벌인 초한전쟁 시기 누경(婁敬)은 말솜씨가 좋고 생각이 치밀하여 유방에게 큰 공을 세웠다. 유방이 중원을 통일했을 때 여러 신하들과 도읍에 대해 상의하였다. 대신들 대부분 동쪽 사람들이라 유방에게 낙양에 건도하자고 건의를 했으나 누경은 유독 강산이 중한 것으로 장안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했다. 중원 형세의 목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누경의 말이 옳다는 판단 하에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누경에게 상을 내리려고 했다. 유방이 누경에게 무슨 것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누경은 ‘유(劉)’의 성을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유방은 기뻐하며 누경에게 ‘劉’의 성을 내려 유경(劉敬)이란 이름을 하사하자 유경이 기뻐했다.
성씨(姓氏)는 혈통의 뿌리의 표기다. 중국은 기나긴 봉건 종법제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혈통에 대해 특히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위에서 예를 든 유경이 다른 금은보화를 마다하고 황실의 성씨를 요구한 것도 무엇보다도 성씨가 중요하다는 성향을 설명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성씨는 무척 많다. 『백가성百家姓』도 다 포함하지 못할 정도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성씨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중국 고대의 서적을 근거로 하면 황제(黃帝)시기에 이미 성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씨와 관련된 학문을 연구하는 서적도 많다. 송대 정초(鄭樵)는 『통지․씨족략』에서 성씨의 내원을 32종으로 귀납시켰다. 성명(姓名)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성이 앞에 있고 이름은 뒤에 쓴다. 성은 단성과 복성이 있고 명은 1자나 2자면 된다. 성은 아버지를 따르고 이름은 마음대로 붙일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름을 가지게 되고 그 성명을 호적에 올리면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과 같이 응당 있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바로 관례에 따라 그저 행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과거 중국을 보면 이렇게 간단하다 싶은 성명은 복잡하고도 엄하기가 그지없었다. 깊은 문화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성명은 사회의 등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가문, 문벌과 종법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성은 아무렇게나 붙일 수 없었고 이름도 마음대로 붙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유성무명(有性無名)’, ‘유씨유명(有氏有名)’, ‘유명무씨(有名無氏)’, ‘무성유명(有姓有名)’, ‘유성무명(有姓無名)’, ‘수자위명(數字爲名:숫자로 이름을 대신 하는 것)’ 등 괴이한 현상이 있었다.
고대의 성은 부족의 이름이었다. 혈통의 표지로 가족의 휘장이나 다름없었다.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귀족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고대의 토템 숭배와 관련이 있다. 고대의 씨족부락은 모두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씨족들은 자신들이 어떤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기원됐다고 여겼고 그 대상을 숭배했다. 이것이 토템이다. 이 토템이 씨족의 성이 됐다. 바로 熊(곰), 馬(말), 牛(소), 龍(용), 梅(매), 林(숲)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성은 모든 씨족이 공유하는 부호요 표지이며 모든 가족, 씨족의 칭호였다. 예를 들어 주대 초기 제후를 분봉할 때 제후국의 수령은 대부분 성이 姬(희)였다. 姬 성의 가족이 아니면 근본적으로 姬를 성으로 쓰면 안 됐다. 주례(周禮)에 “동성(同姓)은 통혼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의 ‘姓’은 ‘혼인하지 말라’는 것으로 쓰였다.
氏(씨)는 姓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요 지류다. 씨와 성은 엄격한 구별이 있다. 씨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같은 성의 귀족들의 후세가 번창함에 따라 거주지역도 나날이 분산되었다. 이에 따라 동성의 씨족에게 다른 분파가 생겨나게 됐고 각각의 분파에 다른 칭호를 붙여 표지로 삼았다. 이 분파의 칭호가 바로 ‘氏’이다. 예를 들어 姬(희)는 주대 선조의 성인데 나중에는 분파가 생겨 孟氏(맹씨), 季氏(계씨), 孫氏(손씨), 游氏(유씨) 등의 지류가 생겼다. 이 ‘氏’는 귀천(貴賤)이 구분돼 있었다. 귀한 자는 氏도 있고 名도 있었지만 천한 자는 이름은 있으되 씨는 없었다. 귀함과 천함의 추세는 불규칙으로 변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氏’는 변하는 것이었고 그것도 무척 심했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伍子胥(오자서)는 원래 ‘伍’가 씨였는데 오(吳)나라에서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이 제(齊)나라로 도망을 쳤다. 귀족에서 천민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氏를 ‘王孫(왕손)’으로 바꿨다. 이렇듯 氏는 변화가 잦았고 그 기원도 복잡하다.
관명을 씨로 삼은 것 : 史(사), 司馬(사마), 司空(사공), 司徒(사도)
조상의 별호를 씨로 삼은 것 : 唐(당), 夏(하), 殷(은)
봉지(封地)를 씨로 삼은 것 : 魯(로), 宋(송), 衛(위)
조상의 시호(諡號)를 씨로 삼은 것 : 莊(장), 武(무), 穆(목), 宣(선)
거주지 이름을 씨로 삼은 것 : 郭(곽), 池(지)
종사하는 직업을 씨로 삼은 것 : 陶(도), 屠(도), 巫(무), 卜(복)
이렇게 많은 氏는 후대로 발전하여 지금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姓’이 됐다.
선진시기 남자들에게 붙이는 氏는 무척 많았다. 商鞅(상앙)을 예로 들면, 公孫炴(공손앙), 衛鞅(위앙), 商鞅이라는 이름을 모두 썼는데 공손앙은 그 조상이 공작(公爵)이라 公孫을 씨로 삼은 것이고 위앙은 그가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라 진(秦)나라로 간 후에 나라 이름을 씨로 삼은 것이며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의 변법을 도운 관계로 상읍(商邑)에 봉(封)해졌는데 이에 商을 씨로 삼은 것이다.
주대의 여자들은 姓은 붙였으나 氏를 붙이지 않았다. 晉文公(진문공) 重耳(중이)가 결혼한 3명의 부인을 예로 들어보자.
제(齊)나라 여인과 결혼하자 ‘姜(강)’을 씨로 삼았고 진(秦)나라 여인에게는 ‘懷嬴(회영)’을 씨로, 적(狄)의 여인은 ‘季隗(계외)’라는 씨로 불렀다. 이 ‘姜’, ‘嬴’, ‘隗’는 모두 성(姓)이다. 氏로 부르지 않은 까닭은 ‘동성은 통혼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남자의 성은 확실하게 구별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할 때는 그 성을 구별하였다. 한(漢)대에 이르러 성과 씨는 점차 합쳐졌다.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됐으며 성에 있었던 귀천의 구분도 사라졌다.
고대에는 분봉에 따르든 종법이나 귀천을 따르든 姓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이름이 있었고 氏를 가진 사람도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보통 평민은 ‘有名無姓’ 즉 이름은 있으나 성이 없었다. 예를 들어 선진시대 ‘庖丁(포정)’, ‘魯班(노반)’, ‘優孟(우맹)’ 등은 모두 평민이었기 때문에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庖丁’의 ‘庖’는 그의 직업이 조리사였기 때문에 붙인 것이고 이름은 ‘丁’인데 ‘丁’이라 부르는 조리사라는 뜻이다. ‘魯班’의 ‘魯’는 나라 이름이고 ‘班’이 이름인 바 ‘班’이라 부르는 노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優孟’의 ‘優’는 배우다. 그렇다면 ‘孟’이라 부르는 배우라는 뜻인 것이다.
성명 이외에 고대인들은 ‘字(자)’와 ‘號(호)’를 자주 사용하였다. 선진시기 이름과 字를 붙여 부를 때에는 일반적으로 자를 먼저 불렀다. 예를 들어 공자(孔子)의 아버지를 사람들은 叔梁紇(숙량흘)이라 불렀는데 사실 그는 성이 叔도 아니요 梁도 아니다. 그는 분명 孔이라는 성이었으며 이름은 紇이요 字가 叔梁인 것이다.
이외에 이름과 字(자)를 부를 때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구별이 있었다. 장자(長者)나 존자(尊者)를 부를 때는 字만 쓰고 이름은 붙일 수 없었고 비자(卑者)나 유자(幼者)는 자신을 부를 때 간혹 이름을 불렀다.
중국 역사상 이름을 붙이는 데에 특별한 예가 있었다. 원나라 때에 서민 무직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평민, 특히 곤궁한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숫자를 가지고 자기 존재의 부호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 태조 朱元璋(주원장)은 출신이 빈한하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重八(중팔)’이요 그의 아버지는 ‘五四(오사)’였다. 장군 湯和(탕화)의 증조부는 ‘五一(오일)’, 조부는 ‘方一(방일)’, 아버지는 ‘七一(칠일)’이었다. 이름에 등급이 엄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고 의병들이 봉기를 할 때 수천수만의 이름 없는 ‘무명씨(無名氏)’들이 원나라 통치자의 종결자가 됐다.
중국인들의 성명이 오늘처럼 변한 것은 역시 역사의 진보라 할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