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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4)]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제주도지사로 취임하면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던 내 옛 얘기는 고교시절로 그치지 않는다. 솔직히 1993년 지사 임명장을 받고 가는 제주행 항공기에서 난 수많은 사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시 농림부에 가기 전 제주도청에서 근무하던 때 얘기다.

 

내가 초임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던 때 도지사는 정우식 지사였다. 다혈질적인 분이었다. 당시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그 역시 육군 헌병대 대령 출신이다. 제주지사로 부임하기 전 서울시경찰국 국장을 역임하셨다. 그런데 성정이 워낙 거셌고, 군출신 특유의 성격 탓인지 지사 집무실에 결재를 받으러 온 간부 공무원들이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정강이를 걷어차는 일이 예사였다. 차분한 성격의 이군보 기획관리실장(차후 도지사 역임)님도 지사실에 업무보고를 하러 갈 때는 나를 지사실로 들여 보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정우식 지사는 나에게 그리 거세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때도 스포츠 머리를 하고 지냈다. 그런 나에게 기껏 하는 얘기는 “까까머리가 그래도 좀 하네”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하루는 지사실에 들어가 잔소리를 듣게 됐다. 이것 저것 보고자료를 고치라고 꾸지람을 듣는 중이었다. 그런데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렸다. 청와대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 지사는 ‘옛!’하면서 거의 ‘차렷’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만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거의 새파랗게 얼굴이 변하는 것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당시 도지사의 관용차 모델은 까만색 크라운이라는 차종이었다. 하지만 새 지사가 부임하면 관행적으로 재일교포들이 벤츠 차종을 선물했다. 지금이야 황당한 얘기지만 그땐 그랬다. 정 지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란색 벤츠를 선물받았다. 그리곤 그 차를 항상 타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그때 출입기자인 송민훈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기자(나중에 홍병철 국회의원 비서관 역임, 송무훈 전 서귀포시장의 동생)에게 치부를 걸린 것이다.

 

그때 송 기자는 출근하다가 지사가 노란색 벤츠가 아닌 까만색 세단을 타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는 “무언가 변고가 있다”란 걸 직감하고 자동차 정비업체 몇 곳을 수소문했다. 확인해보니 정 지사가 자주 타던 노란색 벤츠는 바닷 속에서 건져 올려 모 정비업체에서 수리중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정 지사가 음주한 상태로 운전을 했고, 동승자는 모 요정의 접대부였던 것이다. 송 기자로선 대특종이었을 것이다. 제주시 서방파제에서 차량이 바다로 추락했는데 두 사람이 생환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사연은 송 기자에 의해 기사화됐고, 이를 보고 받은 청와대는 곧바로 정 지사를 경질한 것이다.

 

 

그 다음에 후임으로 온 분이 구자춘 지사다. 대구 출신인 그 분 역시 오시기 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고, 경찰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다. 15대 제주도지사를 끝내고 나중 경상북도 도지사와 서울시장을 거쳐 박 정권 말기 내무부 장관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하신 분이다. 이후 1996년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시절 작고하시기 전까지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공화당·민주자유당 국회의원까지 하셨다.

 

구 지사 시절 난 제주도 기획관이었다. 구 지사는 보고를 중시하는 분이었다. 우리의 보고가 아니라 정부부처를 상대로 한 제주도의 보고에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분이었다. 기획관인 나는 자연히 그런 보고를 도맡아 해야 할 사람이었다. 지금 같은 보고시스템과 달리 언제나 그 시절 중요한 건 차트였다. 도청에 차트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보고용 자료를 PC를 이용, 파워포인트 등 자료로 순식간에 만들어내고 바꾸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글자 하나, 숫자 하나라도 바꾸려면 밤샘 작업을 하고 부분수정이라도 할라 치면 눈에 보이지 않도록 땜질작업을 하느라 끙끙대곤 했다. 우리의 요구가 많다고 차트사가 화를 내 집에 가버리기라도 하면 비상이었다. 기획관실 공무원들이 찾아가 달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다시 도청으로 끌고 와 작업을 하곤 했다. 상전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하루는 밤샘작업을 하고 구 지사의 지시대로 차트를 고치고 갔다. 그런데 그 보고용 차트 중 어느 한 부분에 9가 6으로 뒤집혀 있었다. 이군보 실장님은 지사에게 불려가 한마디로 ‘작살’이 났다. 당시 그런 사정을 몰랐던 나는 그날 따라 이 실장님이 방으로 들어오자 마자 유독 심하게 짜증을 내는 게 못마땅했다. “하느라고 했는데 그 정도 실수면 간단히 고칠 수도 있는건데 너무 한다” 싶었다. 그 분이 하도 짜증을 내길래 나도 엉겁결에 “아이 ×발! 더러워서 못하겠네”란 소리가 버럭 나왔다. 나도 모르게 이 실장님의 책상을 걷어찼다. 사표를 내던졌다. 그리곤 곧바로 조천읍 신촌리 집으로 가버렸다.

 

지금 같은 정보화시대가 아니다. 핸드폰은 커녕 집전화도 상상 못할 때였다. 그때 나와 제주도청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은 신촌리 앞 경비초소를 지키고 있던 경찰관이다. 경찰끼리만 쓰는 경비전화를 통해 도청에서 찾는 일이 잦아 그곳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은 나 때문에 진땀 깨나 흘렀다. 그 경찰관은 우리 집을 찾아 와 “도청에서 찾는다. 나도 자꾸 연락이 와서 힘들다. 빨리 도청으로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응답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많이 미안한 감정이 든다.

 

 

어찌된 일인지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난 일거리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실상 ‘파업 아닌 파업’을 하고 있던 중 대한일보 고익조 기자(작고)가 찾아왔다. 그는 기막힌 제안을 했다. “신 과장! 기자 한번 해 볼 생각 없느냐”는 것이다. 퍼뜩 정우식 지사를 통쾌하게 날려버린 송민훈 기자가 생각이 났다. 그 길로 서울로 가서 시험을 쳤다. 서류·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누군지 모르지만 면접관은 “고시출신이 기자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않고 스스로 “하기야 기자하다 정치할 수도 있지”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쨌든 합격했다.

 

간단한 교육을 받고 제주로 내려왔다. 그때 필봉을 날리던 언론인들을 생각하면서 구자춘 지사의 모든 비리를 파헤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 지사를 내가 기필코 퇴임시키겠다”고 큰소리까지 주변에 뻥뻥 쳤다. 그런데 어느 날 구 지사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하면서도 머리를 긁적이며 내키지 않는 듯 지사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래도 기자랍시고 나름 목에 힘도 주고 들어갔다. 구지사가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 새끼! 너 뭐 기자됐다고. 이 머리 빡빡 깎은 자식아. 잔소리 말고 가만 있어. 승진시킬 테니까. 딴 소리 말고 그냥해!”

 

솔직히 기가 죽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던지 그 기에 눌려버렸다.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구 지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에 내려왔을 때도 그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으시던 분이다. 영애 박근혜는 제주에 내려오면 그를 친숙부 대하듯이 가깝게 대했다. 결국 기자증은 반납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난 다시 제주도청 기획관실로 출근했다.

 

그렇게 승진을 기대했다. 솔직히 군수 자리 한번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승진은 기약이 없었다. 자리는 이제 기획관에서 수평이동, 지역계획과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던 중 70년대 초 청와대로 파견을 가게 됐다. 정소영 경제수석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1년여 정말 열심히 일했다. 제주도관광종합개발계획 밑그림을 그렸고, 지금의 신제주 개발구상도 쑥스럽지만 내 손을 거쳐갔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여러 제의도 받았다. 그때 내무부 고건 지방국장(후일 총리 역임)께서 오라고 한 적도 있고, 건설부로부터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런 내용을 당시 지사였던 이승택 지사(2007년 작고)에게 보고드렸다.

 

17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한 이 지사님은 전임 지사들과 풍모가 다르신 분이다. 경성법전(현 서울법대)을 나와 제주신보 기자로 활동했던 그 분은 제주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고, 제주시 교육감을 거쳐 공화당 조직부장 경력에 노동청장도 지낸 분이다. 71년 7월에 취임한 그 분은 무관출신만 지켜보던 나에게 학식이나 풍모에서 많은 귀감이 되셨다. 그래서 믿고 그분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그랬더니 그 분에게서 돌아온 답 역시 이전 구자춘 지사와 다르지 않았다. “잔소리마라. 내려오면 군수 시킬 거니까 헛소리 말라”는 것이었다. 또 속기로 했다. 파견근무를 끝내고 다시 제주도청으로 돌아왔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낙심하고 있을 무렵 청와대에서 내가 모셨던 정소영 경제수석이 농림수산부 장관으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식량증산 문제가 중요하다보니 경제전문가를 그곳으로 배치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정 수석은 서울대 상대를 나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재무부 차관을 거쳐 농림수산부 장관으로 간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그런데 그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올 생각이 있냐?”는 것이다. 곧바로 대답했다. “네! 가고 싶습니다.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

 

1974년 3월 난 제주를 떠났다. 새로이 근무하게 된 곳은 농림수산부다. 내 보직은 농특사업국 기획계장이었다.<5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간 수감도중 삼무힐랜드는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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