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지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1974년 3월의 일이다. 사무관급 신분이던 난 농림수산부 농특사업국 기획계장이란 자리에 앉았다. 정소영 장관은 예상대로 청와대에서 2년간 경제수석으로 국가의 경제정책을 총괄지휘했던 분 다웠다. 농림수산부의 핵심을 두루 간파하고 있었고, 여러 획기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식량증산이 그 당시 다급한 문제인지라 정 장관은 우선 주식인 쌀 절약에 매달렸다.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진 것도 그 때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장관직을 잘 수행하시던 그 분이 돌연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75년 12월로 기억한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정 정관의 퇴임으로 난 외톨이가 됐다. 난 그분을 청와대에서 모시면서, 그분의 식견과 추진력에 탄복했던 터였다. 오로지 그분만을 믿고 농림수산부 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막상 장관직을 버리고 떠나자 난 철저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서울의 공직자 사회에 제주출신은 찾아보기도 어렵고, 또 난 잘난 서울법대 출신도 아니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농림수산부의 요직은 서울대 중에서도 서울농대 출신이 꿰차고 있는 현실이었다. 서울농대 출신은 흡사 '마피아' 같았고, 난 한마디로 '이단아'였다. 어느 쪽 출신에도 끼지 못하는 나는 철저히 소외돼 갔고, 매번 인사 때마다 난 ‘물’(?)을 먹었다. 쥐뿔도 없는 사무관에 불과할 뿐 서기관 진급은 요원한 상황으로 계속 흘러가게 된 것이다. 물론 상관이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누구 하나 근무평정을 비롯해 나를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행정고시 5회 출신인데 행시 9회가 서기관으로 진급하는데도 난 여전히 사무관이었다. 결국은 버티다 못해 하루는 이승택 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 분에게선 차가운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고 갈 땐 언제고 지금 와서 그러느냐. 버티라”는 것이었다. 괴로움이 더해갔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난 ‘신원특이자’로 분류돼 따로 관리되는 공무원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용어지만 그 용어로 난 철저히 고충을 겪었다.
4·3사건은 우리 제주도민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다. 그 사건과 연결되지 않은 제주도민들이 드물었고, 그 모진 참극을 피해 밀항을 선택한 이도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본으로 간 우리 제주도민들의 친·인척들은 조총련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다수였다. 만경봉호란 배 이름만 대면 떠오를 ‘재일동포의 북송문제’ 등이 내 가정사에도 있었다. 내 6촌 형제들이 일본에서 조총련으로 활동했고, 이들 중 일부는 북송 배를 탔다. 더욱이 아내의 한 형제도 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이런 가정사 탓에 난 ‘신원특이자’로 분류됐다. 물론 나를 진급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빌미로 쓰였고, 그런 이유로 난 ‘산 송장’ 같은 꼴로 전락하고 있었다. ‘신원특이자’ 핑계를 대면 난 그저 고개를 떨궈야 했다. 연좌제의 굴레로 난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한국을 뜰 생각을 했다. 미국 유학시험을 쳤다. 공직자를 대상으로 국비를 지원해 주는 코스였다. 합격했다. 나중 말할 기회가 올 테지만 훗날 나와 특이한 인연을 맺게 된 ‘노태우 대통령의 황태자’ 박철언씨와 함께 그 시험에 합격했다. 박철언씨의 경우 평검사 시절이다. 어쨌건 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준비에 들어갔다. 학교도 정해졌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였고, 단기간이지만 1년 간의 직무연수(On the Job Training)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못 간다는 것이다. 농림부 안에서도 그 이유를 댔다. 이번에도 ‘신원특이자’란 덜미가 등장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러는지 너무도 화가 났다. 그렇게 답했다. “공무원 신분 버리겠다. 유학 후 돌아오면 공직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진급은 그리 어렵더니만 그렇게 답하자 유학 후 갈 곳은 전광석화처럼 정해졌다. 유학도 떠나지 않았는데 1년 뒤 복귀할 곳으로 농협 차장 자리가 내정됐다.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떠났다.
1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은 나에게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그리고 먼 이국 땅에서 조국 대한민국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 때의 경험은 다른 공간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이런 경우는 지금 얘기하고 싶다. 하루는 귀국하기 전날 밤이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 같은 공무원들이 있었다. 하루는 술이 얼큰해졌을 무렵이다. 같은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 공무원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내가 신사무관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종의 감시자였다”는 말이었다. 북한의 5호 담당제 격이었다. 귀국하는 마당에 그 사실을 털어놓은 그를 보고 난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난 “고맙다. 이제라도 얘기 해주니 감사하다”고 말했다. 답답한 현실의 문제로 그와 의가 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오죽 괴로웠으면 그 사실을 나에게 고백했을까 싶었다. 그러다보니 그가 측은해지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76년 말 귀국했다. 1년의 미국생활로 오기가 생겨 버틸 만큼 버텨보기로 했다. 내정됐던 농협 차장직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사표 쓸 수 없다고 우겼다. 별다른 보직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버티는 사이 77년 12월 농수산부 차관을 역임한 장덕진 장관이 새로 부임했다. 정소영 장관이 떠난 후 최각규 장관(후일 경제부총리, 강원도지사 역임)이 있을 때 난 철저히 고립됐다. 그런데 장 장관이 오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 장관은 강원 춘천 출신으로 고려대 법대를 나온 재원이다. ‘첫 고시 3관왕’으로 불릴 정도로 고등고시 외교과·행정과·사법과를 모두 합격하고 공화당 출신으로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래선지 그 분은 고시 출신을 선호했다. 게다가 그 분은 당시 재임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이기도 해 권력의 실세로 불렸다.
그런데 그 분이 장관에 취임하고 나서 승진인사를 하려다 고민에 빠졌던 모양이다. 내가 문제였다. 걸리적거리던 골칫덩이(?)를 어떻게든 매듭을 짓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를 놓고 간부공무원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 똥차는 뭐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 질문에 고위간부들은 예상대로 ‘신원특이자’란 이유를 댔다. 그 때 장 장관은 “야! 제주도놈 중에 신원특이자 아닌 놈 있냐?”고 호통을 쳤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은 나를 어떻게든 승진시키고자 애썼다. 당시 내 진급서열은 47위였다. 5배수로 진급대상자를 정해 발탁하기에 내가 서기관급으로 진급하려면 거기에 맞는 자리 10곳이 필요했다. 그게 가능할 때까지 그 분은 무기한 승진인사를 보류했다. 결국 난 행정고시 10회가 서기관으로 승진할 때 한 배를 탔다. 고시 동기들보다 5년을 밀렸지만 그래도 나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에게 큰 감사를 느낀다.
일이 풀리다보니 어떨 땐 ‘황당하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이게 이른 바 군대에서 말하듯 ‘줄을 잘 선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도 나에게 있었다.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내가 받은 보직은 양곡관리과장이다. 농수산부에서 양곡, 그러니까 쌀 관리를 하는 보직은 나름 괜찮은 자리다. 장 장관이 어찌 보면 대놓고 나에게 좋은 보직을 준 것이다. 1년여 과장직에 충실하고 있을 때였다. 나라에 변고가 벌어졌다. 10·26 사태가 터진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렇게 김재규의 총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10·26 직후 실권을 장악한 건 육사 11기다. “서울법대 위에 육사가 있다”는 말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다. 80년이 되면서 권력의 핵은 보안사령부로 뒤바뀌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출범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깡그리 뒤엎어버린 사건이었고, 실제 5·18은 물론 12·12 군사쿠테타로까지 역사의 격랑이 몰아쳤다. 그런데 그렇게 정권을 거머쥔 보안사에 최기홍 정치과장과 김동조 경제과장이 등장했다. 둘 다 중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비록 육군사관학교 중퇴의 학력이지만 육사 22기 동기들과 그래도 연락은 주고받는 처지였다. 그런데 내 육사 동기인 그 두 친구가 보안사의 요직을 꿰찬 것이다. 오해 없이 들었으면 한다. ‘신군부’의 출범은 나로서도 납득할 수 없는 정변이었지만 묘하게도 난 그 시절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게 됐다.
하루는 보안사의 두 친구가 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총선에 출마하라”는 것이다. “도울 테니 무조건 당선된다.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단박에 거절했다. “이 미친 놈들아! 내가 무슨 정치를 할 위인이냐? 난 국가의 녹을 먹고 산 공무원이다. 지금 너희들의 행동은 나중 큰 화(禍)가 돼 돌아올 것”이라고 정색했다. 그러자 두 친구는 서로 멀뚱멀뚱 날 쳐다보더니 “그럼 좀 쎈 자리로 옮겨주겠다. 양곡관리과장 말고 총무과장 시켜줄게”라고 말했다.
보안사의 ‘끗발’이 세긴 셌다. 대령급이 각 정부부처에 파견돼 조정관 역할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각 정부부처의 고위관료들을 쥐고 흔들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저 시큰둥하게, 솔직히 큰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부끄럽게도 센 권력의 등을 업게 됐다. 요직인 양곡관리기금을 총괄하는 회계과장으로 전보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총무과장이 됐다. 그렇게까지 순식간에 변화가 올 지 몰랐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다. 웬만한 공무원들이라면 다 알 테지만 총무과장이 됐다는 건 다음 인사 때 국장승진을 예약했다는 의미다. 이후 난 농림수산부에서 최연소 국장으로 승진했다.
4·3이란 연좌제의 굴레에 갇혀 ‘신원특이자’로 낙인이 찍히다보니 더 이상 오를 곳도 갈 곳도 없었고, ‘제주출신’이었기에 믿을 만한 ‘빽’도 없어 구박만 받았고, ‘육사’출신이었기에 농림부에서 철저히 따돌림 당했던 나는 ‘신군부’의 든든한 ‘빽’으로 묘(?)하게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이념의 굴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똥차’ 취급을 받던 내가 신군부의 등장으로 기사회생(起死回生)한 것이다. 나로선 지금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아이러니다. 그저 “인간사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게 이런 것인가”라고 곱씹어 볼 뿐이다. <6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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