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0년 12월5일 새벽 5시. 전날 굳은 결의를 마음 속으로 다지고 YS의 서울 상도동 집을 찾았다. 그리고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조깅을 나간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가는가?”라며 난감해 하던 차였다. 혹이나 하는 마음에 대문 옆으로 난 쪽문이 보이길래 두드려봤다.
웬 할머니가 문을 열더니 날 빤히 쳐다봤다. “어찌 오셨수?” 후일 YS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가 특유의 칼국수 솜씨를 선보인 할머니였다. 청와대로 간 뒤 언론에서 ‘밥 할머니’로 꽤 유명세도 치른 분이다. 그 분에게 간단한 소개를 하고 “대표님을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다”고 여쭙자 기다리라며 손짓을 하고 안으로 쑥 사라졌다. 그리고 5분여 뒤 집안 한 켠으로 안내를 받았다. 들어가보니 한마디로 진풍경이었다. 수십명의 기라성 같은 ‘백성’(?)들이 좁디 좁은 방 안에 주욱 줄지어 있었다. 더욱이 황당하게도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강보성 전 장관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 분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신구범! 너 어떻게 왔냐?” 곧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관님이 망쳐 놓은 일 때문에 왔습니다.” 그리곤 나도 자리를 잡았다. 강 전 장관은 무안한 얼굴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2~3시간이 흐르자 순서가 됐는지 2층으로 올라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에는 한쪽 구석에 탁자, 그리고 대나무 의자 3개가 놓여 있었다. “신 국장이라고 그랬지? 뭐 마실래?” YS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쑥스러워 별 말을 못하자 그는 손수 차를 만들어 주셨다. 그 때 사실 그분의 풍모를 보며 솔직히 좀 감동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하며 다소 그분에게 매료되고 있을 무렵 그가 다시 물어봤다. “그래 무슨 일로?” 일단은 기회는 얻었다는 걸 직감하고 기다렸다는 듯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동안의 경과를 각종 자료를 보여드리며 브리핑했다. 그러자 YS는 “장관이 그걸 왜 안 막았지?”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저간의 사정을 또 말씀드리자 그의 답은 “알았어!”였다. “도와주십시오”란 말로 인사를 대신해 나오려자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신국장이라고 그랬지?”
그리고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찾아뵌 당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가든에서 민자당 당직자 회의가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YS대표와 민자당 최고위원 3인, 정책위의장·원내총무·대변인, 그리고 국회 농림수산위 소속 전 국회의원이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여당 대표최고위원인 YS가 모든 사안을 뒤엎었다. 마사회의 체육부 이관계획을 전면 보류, 농림부에 존속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 버린 것이다. 난리가 났다. 그때 노대통령은 모스크바로 출타중인 시점이었다. 그 때 대통령 비서실장은 노재봉(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출신, 후일 총리 역임)씨다. 노재봉 비서실장과 박철언 전 체육부 장관이 들고 일어섰다. “대통령 부재 중 대통령의 정책을 뒤엎는다면 이건 반역”이라며 YS를 몰아 붙였다.
단 하룻동안 만세를 불렀다. 단 하룻만의 기쁨으로 끝났다. 하룻만에 YS가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상황이 권력실세 간 대결로 치닫자 YS가 물러선 것이다. 그가 당직자 협의에서 내세운 기조가 물거품이 되면서 난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오갈 데 없는 신세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YS가 입장을 번복하자마자 국회 농수산위원장인 민자당의 안병욱 국회의원이 나를 불렀다. 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는 대뜸 “이 새꺄! 너 때문에 나까지 죽을 판에 몰렸다. YS가 그래야 된다고 해서 옳다고 거들었는데 박철언이하고 노재봉이가 치고 나와 나까지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그냥 포기할 수 없어 YS가 사안을 뒤집은 며칠 뒤 국회 행정위 소속 이종찬 국회의원(DJ 정부 시절 초대 국정원장)을 만났다. 그 분에게 “시행시기라도 좀 늦춰달라”고 통사정을 하자 국회 행정위 논의를 질질 끌더니 어찌 된 건지 1991년 1월 마사회 이관은 1년 뒤로 미뤄졌다. 묘한 인연이지만 마사회는 DJ 정부시절인 2002년 초 체육부에서 다시 농림부로 넘어왔다. 10년 만에 내 의지가 관철된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시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그해 12월 21일 강영훈 총리(대한적십자사 총재, 주한 바티칸 대사 역임)는 국무회의에서 “물의를 빚은 농림부 축산국장을 엄중 문책하라”는 지시까지 따로 내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총리가 농림부의 일개 국장의 징계를 따로 지시한 일도 아마 초유였을 것이다. 총리의 지시가 나온 날 오후 강보성 장관의 후임인 조경식 장관(초대 환경처 장관, 한국해양대 총장 역임)이 날 불렀다. “총리에게 사정하겠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다. 모든 게 물 건너 간 것이었고, 더 이상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제가 선처를 호소할 일은 없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을 갑니다. 책상에 있는 제 사표나 빨리 수리해 주십시오.” 그게 내 답변이었다. 이미 끝난 일을 괜스레 부여잡아 농림부의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축산농가들이 들고 일어섰다. “마사회의 농림부 존속은 당연히 농림부 관료가 주장해야 할 일이며,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보여준 신 국장의 탁월한 능력을 사장시켜선 안된다”며 진정서, 항의문이 농림부와 총리실에 쏟아졌다. 또 골칫덩이였다. 박철언 측은 나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축산계의 분위기를 깔아 뭉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 총리의 지시가 있고 난 뒤 이 역시 단 하룻만에 결론이 났다. 12월 22일 난 미국으로 연수교육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됐다. 축산농민과 농림부와의 타협책이 나를 미국으로 쫓아보내는 것이었다. 웃음 밖에 안 나왔다. 그 때 내가 적어둔 메모를 뒤적이다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코메디를 보는 기분이다. 내가 JP(김종필)·정호용도 아닌데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라니···.” 아마 그 시절 3당 합당의 주역인 JP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실세였던 정호용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찬밥’ 대접을 받으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외유를 떠나며 언론에 회자되던 말을 내가 옮긴 것 같다. 그만큼 내가 그 정도의 위인도 되지 않는데 이리 찍혀서 쫓겨나는가 싶어 마음 한 구석에 휑한 바람이 분 것 같다.
1991년 3월31일 난 김포에서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내 의지와 상관 없는 일이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신분으로 간 것이지만 내막은 거의 ‘국외추방자’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 나중 아시아재단의 한국대표를 맡은 존 스타인버그 박사를 만나 공동논문을 쓸 기회를 얻었던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또 다른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여서 지금 생각해보니 박철언 전 장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 미국행에서 나로선 인생을 깨우친 사건도 있다. 하루는 한국의 나환자 정착촌에서 미국의 숙소로 편지가 왔다. 발신인엔 나환자 축산인들의 모임인 한성협동회 이름이 씌여 있었다. 그런데 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 미화 1,000달러가 들어 있는 것이다. 동봉된 편지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를 도와준 축산국장님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잘 견디십시오. 돌아오는 날 저희들이 한 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내가 그런 나를 미소로 지켜봤다. 사연은 이랬다. 1989년 가을 무렵 축산국장이 되고 나서 지금 이름은 잘 모르지만 한 수녀가 나를 찾아왔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농무관으로 근무하던 때 알게 된 강모 수녀님이다. 제주출신이기도 한 그 분은 그때 유학을 온 분이셨다. 그런데 그분은 그때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 성모병원 간호사인 신분으로 나를 찾아와 나환자 정착촌을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양성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를 제외, 전국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은 100여곳이 넘는다. 그 나환자들은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계란의 34%를 생산하는 축산업 종사자들이었지만 축협에 가입하지도 못했고, 중간상인들에게 언제나 사기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강 수녀의 말은 그 말인 것으로 직감했던 터라 뜨끔했다. 1주일 휴가를 얻어 아내와 함께 전국 10여 곳을 우선 살펴봤다. 가관이었다. 한마디로 정책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휴가가 끝난 직후 지원계획을 세웠고, 4년간 필요예산으로 140억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우선 1차 연도인 90년에 40억원을 지원했다. 그런 내가 미국으로 뜨자 그 나환자 축산인들이 나에게 고마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때 알았다. 하늘이 나에게 내린 소명은, 젊은 시절 고작 6개월의 고시준비로 합격할 수 있었던 영광을 준 이유는 그런 이웃을 돌보라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난 그 돈을 제주도 고향의 한 개척교회로 보냈다. 힘 없는 이를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는 마음만 전했다.
어찌됐건 1년여 객원연구원 생활을 정리하고 92년 초 귀국했다. 아무런 보직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신세가 됐다. 내가 국장 중에서 최고참이었는데 수개월 동안 대기발령 신세였다. 그러다가 농촌경제연구원으로 파견 발령이 났다. 물론 소속만 그렇지 아무런 일감도, 보직도 없었다. 건물 3층 한켠 사무실에 달랑 책상 하나뿐이었다. 알아서 나가달라는 소리처럼 보였다. 하루 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이었고, 농림부의 발전을 가로막는 ‘똥차 중의 똥차’로 전락하고 있다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연구원에 출근하고 난 뒤 너무도 답답해 무작정 차를 끌고 서울을 나왔다.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달리다 보니 어느덧 완도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제주로 갔다. 내 고향 제주라도 가면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그냥 배를 탔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에서 공직생활 도중 허물없이 지냈던 김규필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그 친구는 제민일보 기자로 재직중일 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친구와 성산포로 내달렸다.
그 시절 성산포에 단골식당이라고 있었다. 그 식당의 주인이름은 정유진으로 기억한다. 키도 작고 배도 불룩했던 것 같다. 호남 어느 곳이 고향이었던 분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식당에 김 기자와 앉아 있는데 아마 내 얼굴이 우거지상이었던 모양이다. 그 분이 “손님 왜 그러시냐? 식사 맛있게 해야 하는데···”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더니 그 분은 짐짓 “제가 얘기 하나 할까요?”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루는 관광객이 가게에서 식사도중 매운탕에서 파리를 발견하고 노기 서린 눈으로 자신을 부르더란 것이다. 손님이 타박을 하려하자 그는 얼른 손으로 그 파리를 집고 입에 넣었다고 한다. “이 좋은 게 왜 여기 있지?”라고 웃음 지었다는 것이다.
박장대소를 했다. 상황을 절묘하게 반전시킨 그의 재치가 놀라웠다. 그렇게 한바탕 웃어 제끼자 그가 말했다. “이거 보십시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인가요? 산다는 거 별거 아닙니다.” 가슴이 고동쳤다. 답답한 내 마음이 신기루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삶의 방향전환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 분에게 “당신! 내 얼굴 똑똑히 기억해두라”며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난 1993년 말 도지사로 부임하고 난 뒤 제일 먼저 그 식당을 찾았다. <9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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