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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20-2부 1편)

2부를 시작하며

 

이제 격동의 현장-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의 회고 2부를 시작합니다. 1부가 신 전 지사의 ‘꿈과 도전’을 다뤘다면 2부는 신 전 지사의 ‘새로운 도전과 좌절, 그리고 시련’을 풀어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도전과 좌절, 성공의 역사를 통해 제주현대사의 의미와 과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여러분의 열띤 성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떠돌이나 다름 없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손을 잡고 내려온 고향 신촌마을에서의 내 첫 기억은 참혹,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는 1948년 음력 4월 세상을 뜨셨다. 해방이 되면서 귀국한 아버지는 서울 용산에서 사업을 한답시고 기세를 올리다 부친의 사망소식에 제주로 내려왔건만 4·3사건이라는 변고는 그를 제주에 가둬 버렸다. 아버지는 그 변란 속에서 4·3 무장대의 총수인 이덕구·이호구 형제와 두터운 친분 덕(?)에 입산 길에 올랐다. 물론 한동안 산길을 따라 도피생활을 하다 하산 길에 경찰에 붙들려 즉결처분을 받을 뻔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이다. 아버지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이전 편에서 그런 과거를 떠올렸다. 무장대의 총수인 이덕구의 아들이 내 초등생 시절 옆짝이건만 그마저 어느 틈에 사라진 얘기마저 이미 꺼냈다.

 

그 4·3이 한창이던 무렵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나와 10살 때 폐렴으로 숨진 내 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언제 죽임을 당할 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기억으론 청년들을 중심으로 신촌에서도 데모가 많았다. 구호가 ‘신착 가리착’이었다. 신발을 뒤집는다는 뜻이다. 국가전복의 의미처럼 느껴졌다. 삼양지서가 습격 당했을 땐 새벽에 군경 토벌대가 한달된 갓난애까지 포함해 전 주민을 신촌초등학교에 불러세웠다. 기관총이 내걸리고 전원이 몰살 당할 위기였다. 그런데 삼양출신인 한 경찰관이 “무고한 백성을 죽이려면 나를 쏘고 죽여라”고 맞섰다.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 사람 덕에 마을 사람 다수가 살았다. 하지만 군경 토벌대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을 주민들을 신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불러 세워 연령대 별로 마을주민들을 세워 놓고선 어떨 땐 홀수 연령대, 어떨 땐 짝수 연령대를 지목하고 함덕지서로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 간 마을 분들을 그후 다시 보진 못했다.

 

 

 

 

어느 날 난 그 군경토벌대의 군용차량에 동생과 돌팔매질을 했다. 그날은 어머니가 학교 운동장에 끌려간 날이었다. 그들이 정말 미웠던 모양이다. 물론 군인들은 내 뒷덜미를 잡고 “네 부모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가리켰다. 파랗게 질리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그 대열에서 풀려났다. 난 그 시절 서울말씨를 쓰고 있었다. 나름 어기짱을 부리며 서울말로 무어라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한 헌병소위가 어머니를 풀어주며 즉석에서 일종의 증명서를 만들어 주었다. 내용은 “이 여성은 구금·연행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에도 어머니가 한동안 그 문건을 갖고 계셔서 내용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헌병소위 이름이 ‘이갑성’이란 것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한 밤 ‘산사람’들이 내려오면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다. “군인들이 어머니를 살렸다”는 게 오해받기 쉬운 일이었다. 숨죽이며 지냈다. 밤만 되면 피신을 해 있던지, 아니면 어머니와 나, 동생 셋이서 ‘굴묵’ 안으로 숨어 들었다. 보릿짚으로 위장을 하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하며 살았다. 기억 속엔 군경 토벌대가 들이닥치면 동네 어떤 아저씨가 일종의 ‘앞잡이’ 역할을 했고, 그 분이 지목한 분들은 여지없이 토벌대에 끌려갔다. 물론 그렇게 끌려간 분들이 돌아오는 법은 없었다.

 

지독히도 슬픈 현실이었고, 기억하기 조차 괴로운 일이다. 그나마 가족의 목숨을 부지한 나의 기억이 이럴진대 우리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청년기를 보내고 공무원 생활을 하며 내가 4·3에 대해 가진 기억은 “우리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이자 희생자”라는 것이었고, 어떻게든 그 한맺힌 절규의 목소리를 풀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1993년 12월 말 YS정부 시절 관선 제주도지사로 부임한 나로선 그렇기에 4·3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 시절 나의 중대현안 세가지는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을 확정하는 것과 우루과이라운드(UR)로 다급해진 감귤 대책, 그리고 바로 4·3의 해결 문제였다. 그래서 서둘렀다. 다음해인 1994년 1월25일 제주도의회 도의원 세 사람을 초청, 의견을 나눴다. 도의회에 이미 설치된 4·3특별위원회 위원들로 위원장인 김영훈 의원과 고일문(최근 작고)·이영길(나중 정무부지사 역임) 의원이다. 저녁식사를 곁들여 만난 자리에서 내 생각을 진솔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 거론된 게 재야와 유족회로 나눠 치러지던 4·3 위령제를 분열을 종식한다는 의미에서 ‘합동위령제’로 치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해 2월 23일 그 당시엔 군경 유가족이 중심이었던 유족회 분들을 만났다. 교사출신인 김병언 유족회장과 회원들이다. 그 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입장이 서로 다른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을 끝내자. 재야단체와 협력해 옛 선조들의 아픔을 위무하기 위한 합동위령제로 갔으면 한다. 그러면 제주도 역시 적극 협력하겠다”.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유족회 측은 대승적 차원에서 그럴 의사가 있다는 뜻을 보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내 속마음은 김영삼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우선 우리부터 단합된 의견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일단 첫 단추는 잘 뀄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용단이 필요한 때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얼마 안 있어 초도순시 차 제주로 올 예정이었다. 그 기회를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기회가 왔다. YS는 그해 3월4일 오후 4시40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심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기 전부터 대통령 비서실에서 여러 차례 연락이 오더니만 일정들이 오락가락 뒤바뀌었고, 막판엔 “요란스런 초도순시 행사를 자제하라”며 제주지역 기관단체장과의 만찬을 취소하고 우리 부부와 대통령 부부 간 저녁 만찬만 일정에 남겼다. 이 기회라도 십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려온 당일 YS는 곧바로 도지사 공관으로 왔다. 그는 저녁식사 도중 여러 가지 정치현안을 화제로 꺼냈다. 그는 입법을 앞둔 정치개혁 관련 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제주도 순시 이후엔 방일(訪日) 계획이 있는데 호소가와 총리와 각별한 사이라는 얘기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UR 쌀 개방 문제로 넘어가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핫라인을 열어 두었기에 잘 마무리됐다는 얘기도 전했다. 하지만 이경재 등 여당 국회의원들이 정부의 UR문제 해법에 부정적이었다고 개탄하더니만 제주도가 감귤간벌 등 UR대책을 잘 하고 있다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 대한 불평도 잊지 않았다. 그는 그 시절 언론이 ‘문민독재’란 말을 꺼내자 대단히 불쾌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나와도 인연이 깊은 체육부 존폐 문제에 이르러선 “전임 노태우 대통령 측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며 체육부 부처를 없애지 못했다는 점을 개탄했다.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기회를 엿봤지만 이 자리는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다음날 오전 5시10분. 대통령과 난 제주제일고 운동장을 달렸다. 문민정부 출범 이전에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아침 조깅에 동행한 것이다. 이때가 기회라고 봤다. 25분간 그와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난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46년 전 참혹한 일들을 지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제주도민 전체가 피해자다. 그런데 유족들이 한날 한시에 한곳에서 함께 위령제도 못 치른다면 말이 되는가?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YS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그렇게 해야지”라고 짧게 말했다. 바로 당일 오전 10시 제주도청 업무보고 현장. 준비했던 대로 건의사안에 넣은 ‘합동위령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잘라 말했다. “금년부터 그렇게 하시오.”

 

 

 

 

대통령이 떠난 뒤 안기부가 움직였다. 안기부 제주지부장은 “불가능한 일이자 곤란한 일”이라며 완강히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경찰청장은 입을 다물었다. 3월12일, 다시 3월15일. 유족회와 도의회, 재야단체인 4월제 공동대책준비위원회 인사들이 서로 만나도록 주선하거나 직접 나서서 중재하거나 아니면 도의회를 독려, 중재를 거듭하도록 했다. 솔직히 그 시절 난 안기부 등 기관의 의견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어차피 합동위령제의 주체는 도의회 등과 민간단체가 돼야지 정부기관이 관여할 성질이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차례 얼굴을 맞대도록 하고 난 어느 날 마침내 서로의 합의가 이뤄졌다. 나로서도 기뻤다. “같이 위령행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벗어나 우리끼리 갈등은 종식하자”는 것으로 뜻을 모은 것이다.

 

3월15일 최종합의가 이뤄졌지만 난 그 직전 김창렬 천주교 제주교구장을 따로 찾아갔다. 조언을 구한 것이다. 그분의 얘기는 이랬다. “상처가 아물어갈 땐 그걸 다시 헤집어선 곤란하다. 잘 아물게 놔둬야 한다. 그게 상처를 치유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나로선 상처치유의 첫 걸음을 합동위령제로 봤다. 항쟁이냐? 폭동이냐? 그런 논란이 여전히 한창이던 때이지만 그건 김 주교의 말마따나 상처를 헤집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고, 우선 억울하게 숨져간 원혼들을 공동으로 위무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이 풀리려고 하자 모두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3월18일엔 제주도청 부근 마리나가든에서 김영훈 도의회 4·3특위원장과 간사, 공준위 대표인 고창훈 제주대 교수, 김병언 유족회 회장 등이 모두 만났다. 서로의 합의를 높이 평가하고, 경건하고 훌륭한 위령제로 만들자고 다짐도 했다. 유족회를 의심하던 공준위와 재야에 불만을 갖던 유족회가 이날 대승적 차원에서 손을 맞잡는 장면을 연출했다. 합동위령제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란 점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1994년 4월3일 오전 10시 제주시 탑동광장. 그동안 각기 따로 찢어지고 갈라져 4·3원혼들을 위무하던 위령제가 사상 처음으로 합동위령제 형식으로 그곳에서 열렸다. 솔직히 나로서도 감동이 컸다. 그날에 대해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숨겨진 한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오열. 구천에 떠도는 원혼들에 대한 위로와 진무(賑撫).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위한 위로가 아닌 이념의 대립구도에서 빚어진 그들만의 분열. 그런 그동안의 분열과 대립을 치유하기 위한 현장이었다.” 내 생각이다. 현장을 본 나의 감상이었다. 솔직히 기억에 없지만 내 기록을 보면 그날 난 앉자마자 눈물을 보였던 것 같다. 그만큼 내 마음 속에서도 도지사로서 해야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사실 난 기독교인이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날 난 합동위령제 제단에 모셔진 각 읍·면 별 위패제단을 모두 돌았다. 모든 읍·면 희생자들에게 술잔을 올렸고 절을 했다.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기독교인들로선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그날의 일기에 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제주의 슬픈 역사를 외면할 수 없었거니와 희생자 유족들 앞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절과 잔을 거부할 만큼 잔인할 수 없었다.” 천주교와 불교 측 대표자들까지 참석, 그 위령제를 지켜보며 숨진 넋들을 달랬다. 이제 짚고 넘어가려 한다. 기독교측 대표자들은 그날 현장에 오지 않았다. 그해 4월3일이 일요일이면서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왜 있는가? 몇 만명이 숨진 넋을 위무하는 현장에 종교행사를 이유로 오지 않은 건 나로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소동도 있었다. 첫 합동위령제 제단에 이덕구와 조몽구 등 수뇌급 주모자들의 위패가 모셔졌던 것이다. 4·3사건 시절 입산게릴라 부대의 사령관이자 내 부친과도 인연이 있는 이가 그들이다. 물론 위령제 행사가 끝나자마자 다음날 오전 경우회 멤버 등을 비롯한 보수단체 회원 15~16명이 도청으로 쳐들어 왔다. 그들로선 항의할 만 했다. 위령제를 치르기 전 합의된 사안이 ‘이덕구 등 주모자는 위령제단에 위패를 두지 않는다’였다. 그런데 그 시절 누구의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르지만 위패가 올라갔다. 서서히 풀릴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소수의 과욕과 편견으로 그르치는 일이 많다. 그 시절 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4·3을 숭고하게 얘기하면서 그날 하룻동안만이라도 도민들이 함께 음주와 가무를 자제하며 추모를 한 적이 있는가? 원한이 맺힌 일이라도 50년이 지나면 원수끼리도 사돈을 맺는다. 우리가 이런 정도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사회였는가?” 그렇게 물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해 6월6일 현충일엔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 ‘신구범은 빨갱이’란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 안타깝다.

 

정책적인 견지에서 4·3문제를 매듭짓고 싶다. 그렇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얘기한다. 1998년 3월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첫 총리였던 김종필 총리에게 4·3문제에 대해 보고를 드렸다. 그 보고에 ‘4·3문제 해결의 4대 원칙’을 제시했다. 정부의 사과가 있어야 하며 그 차원에서 제주도민의 보상요청은 않겠다는 것. 그리고 4.3의 진상규명을 정부가 책임지고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해달라는 것. 이어 마지막으론 그 시절의 아픔을 기릴 수 있도록 위령탑 건립을 국가사업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많은 부분이 해결됐다. 비록 그후 치러진 선거에선 낙선했지만 이후 DJ가 관련 특별법을 공포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우리 제주사회에 남겨진 패배주의와 과거에 잉태된 분열의 씨앗이다. 그 하나가 정부에 떼쓰듯 매달리는 ‘국가추념일’ 지정 문제다. 솔직히 그런 접근을 난 반대한다. 우리 스스로 ‘제주도민 추념의 날’로 지정, 그에 따른 제주도 차원에서의 추념행사를 왜 하지 않는지 난 모르겠다. 그런 것부터 하지 않고 그렇게 애처로이 정부에게 손을 벌리고 있어야 하나?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존을 드높일 때 언젠가 정부로선 ‘국가 추념일 지정’을 받아들일 일이다. 그리 사정하며 매달릴 일이 아니다.

 

더 마음 아픈 일도 있다. 4·3을 생계수단화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4·3을 팔아 먹는 것이다. 제주도민 모두의 아픔이자 역사자원을 사유화하려는 준동인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런 광경을 목도한다. 더욱이 그 마저도 모자라 정치의 계절이 오면 4·3을 정치판의 소재로 활용, 정파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을 보며 몹시 마음이 괴롭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요 추악한 행태다.

 

우리 도민이 하나가 돼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새로운 전진의 길로 나서야 한다. 그 때가 되면 대한민국 차원의 재평가와 재정립은 순식간에 달려올 밀물이다. <21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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