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빚을 졌다. 밝히는게 도리라고 보기에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낸시 애덤스(Nancy Adams). 한-미간 쇠고기 협상 타결에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0년 봄까지 이어진 한-미 협상에서 미국측 수석대표였다. 당시 칼라 힐스(Carla A. Hills)가 대표였던 미국 무역통상대표부(USTR)의 부차관보 신분이었다.
그녀는 집요했다. “한국은 OECD 반열에 이미 진입했고, 시장개방 일정표를 내놓으라는 GATT의 평결을 수용했다. 더 이상 쇠고기 시장개방을 미루면 GATT 협정의 슈퍼 301조 조항에 따라 일부 품목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와 관세부과 등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으름장이었다. 난 이에 대해 “양국의 축우산업에 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공동조사단을 꾸리자”며 맞서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러다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미국측 협상단에게 우리 축산실태를 터놓는게 낫다 싶어 90년 1월 한겨울에 경기도 광주의 한 축산농가로 그들을 안내했다. 외양간에 소 한 마리가 묶여 있는 허름한 농가였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도대체 목장이 어디 있는가?” 내 대답은 이랬다. “This is our beef industry."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미국의 농장만을 생각하는 그녀로선 어이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 현장을 본 덕인지 그해 3월 미국과의 협상을 마무리지을 때까지 오히려 그녀가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자국에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서 더 적극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정리한 게 그녀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그녀와 따로 만나는 기회도 자주 가졌다. 한국 축산업의 현실을 소상히 설명해주는 기회로 이어지는게 다반사였다. 결국 90년 3월 미국과의 협상은 마무리됐다. 5년을 끌어온 문제가 국영무역 형태의 수입쿼터로 결판난 것이다. 미국과 문제를 해결하자 후속타인 호주ㆍ뉴질랜드와의 협상은 술술 풀렸다. 미국과 합의한 수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90년 6월27일 한국과 미국ㆍ호주ㆍ뉴질랜드 간 협상은 모두 타결됐다.
우리 외무부는 한국측 쇠고기 협상 대표단을 적대시했고, 경제기획원은 사사건건 간섭만 했으며 주미 한국대사관은 철저히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농림부 축산국 만으로 5년간 끌어오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워싱턴에서 최종 협상을 끝내고 농림부 직원들끼리 축하와 격려를 나누는 자리엔 마침 미국 출장길에 오른 옛 농림부 식구까지 참여, 환호를 같이하기도 했다. 농림부 사무관 출신인 정정길 교수(울산대 총장, MB정부 초대 대통령실장)다. 그의 박수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한-미간 쇠고기 협상을 그래도 바라는 대로 매듭지은 난 사실 우쭐했다. 농림부 축산국장이 협상의 수석대표가 된 일도 없거니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려 농림부 안에서 난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농림부 축산국장으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노태우 정권은 이제 집권 중반기를 보내고 있었고, 농림부의 현안은 쌀시장 개방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른 우루과이라운드(UR) 문제에 쏠려 있던 시점이다. 그 때 농림부 장관은 제주출신 강보성 장관이다. 그 외 체육부 장관 정동성, 총무처 장관 이연택, 청와대 행정수석 이상배. 이렇게 ‘3인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해 봄 이 3인방은 농림부가 관리하는 마사회를 체육부 소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체육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그 사안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그러라는 대통령의 재가도 얻었다.
안될 말이었다. UR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농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별도의 돈이 필요한 마당에 그나마 여유자금을 굴릴 수 있는 마사회를 체육부로 뺏긴다면 결국 우리 축산농민들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버는 격’이 될 게 뻔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경마로 수익을 올리던 마사회는 한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 때문에 농림부는 축산농민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그 마사회의 수익금 중 50%를 축산업 강화를 위한 재원으로 쓸 생각이었고, 실제로 축산농업경쟁력 강화기금을 만드는 방안으로 마사회법을 이미 개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마사회를 체육부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실무국장으로서 내용과 그 파장을 소상히 알고 있는 나로선 막아야 할 일이었다. 강보성 장관께 직언을 했다. “막으셔야 합니다. 마사회가 체육부로 넘어가면 우리 농민들은 개털이 됩니다.”
강 장관은 호방하게 대답했다. “신국장! 걱정하지 마라. 내가 누군가?” 그 분은 그렇게 장담했다. 당연히 강 장관이 체육부 장관을 만나 잘 풀어낼 것으로 봤다. 그런데 장관 부속실과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을 해 봐도 우리 장관이 청와대 인사나 체육부 장관을 만난 것으로 보이는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았다. 그 3인방의 배후인물은 따로 있었다. 박철언! 70년대 중반 검사시절 나와 함께 유학시험을 치르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가 배후였다.
기억할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는 지금도 언론에 오르 내리며 아직도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만큼 그 시절 박철언이란 사람의 위세는 대단했다. 언론이 붙인 그의 닉네임은 ‘6공의 황태자’다.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 사촌동생으로서 5공 헌법을 기초했고, 민정당 국회의원을 거쳐 정무1장관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이미 노태우 정권 초기 체육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권력의 막후에서 여전히 체육부의 각종 정책과 방향, 시책사업을 주무르는 권력의 핵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그가 배후였기에 강 장관은 맞서는 걸 포기한 것이다.
공직생활 두 번째로 사표를 썼다. 강 장관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사회가 체육부로 이관되는 꼴을 주무 축산국장으로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다”고 말씀 드렸다. 일개 국장 신분이지만 정면으로 맞서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덤빈 것이다. ‘마사회 이관에 대한 축산국장의 입장’이란 서신도 농림부에 공개 게재했다.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3인방의 움직임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마사회를 체육부로 옮기란 지시가 농림부에 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농림부에서 여러 가지 사유를 들어 반발하자 노 대통령은 "재검토하라“고 지시를 바꿨다. 그런데 한 달만에 또 ”마사회를 옮기라“고 지시했다고 체육부에서 얘기가 나온 것이다. 며칠 뒤 또 대통령의 지시라며 똑같은 지시를 다시 체육부에서 들먹였다. 직감적으로 두 번째부터 지시는 '가짜'라고 판단했다. 대통령이 할 일이 없어 두 번씩이나 연거푸 똑같은 지시를 내린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것이었다. ”지시의 주체가 의심스럽다. 대통령 지시라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체육부에 따졌다. 정식으로 정동성 체육부 장관을 만나겠다고 면담을 요청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정동성 장관도 ‘물건’이었다. 당시 여당은 3당을 합당한 민주자유당이다. 국회 민자당 원내총무실에서 정 장관을 만났다. 정 장관이 말했다. “새끼 국장 주제에 조무래기가 까불고...” 기가 찼다. 그 말을 듣자 독기가 발동했다. 곧바로 되받았다. “아니 국장은 입이 없습니까?” 언성이 높아지고 고함이 오고 갔다. 내 기세가 꺾이지 않자 정 장관은 “아니 이놈 봐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하며 입을 다시더니 “어쨌든 신국장 손해는 안보게 하겠다”고 말을 누그러뜨렸다. 찍혀서 인사상 손해는 보지 않게 할 테니 그만 물러서라는 뜻이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 일신의 안위를 걱정했다면 여기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는 “이 새끼 되긴 된 놈이네. 너 할 일 다 했으니 적당히 그만해라. 내가 인정해준다”란 말을 툭 던지고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는 국회 농림수산위원회에 출석, 마사회를 체육부 소관으로 옮긴다고 보고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9월 하순에 이르자 강보성 장관은 돌연 경질됐다. 경기도 안성에서 벌어진 전국 농어민후계자대회에서 정부의 농정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직무수행 능력을 의심받은 것이다. 더 시간을 끌다간 마사회의 체육부 이관이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았다. 축산업계와 축협, 학계의 반발이 지속됐다. 첨예한 이슈로 불거지자 KBS와 동아일보가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마련한 토론회엔 언제나 내가 나가 농림부의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그 시절 청와대의 모 행정관과 비서관은 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은 농민을 사주한 공무원이란 소리를 듣고 있다. 문책 당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으라”는 소리였다.
정면 돌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봄부터 농림부와 체육부의 기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어느덧 때는 늦가을로 접어 들었다. 11월이 되자 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 부칙 개정안이 심의의결됐다. 마사회를 농림부에서 체육부로 이관하는 내용이었다. 엄연히 마사회법에 마사회 지도감독기관을 농림부로 지정하고 있는데도 그것조차 무시한 법 개정안이 나온 것이다. 이제 국회만 통과하면 마사회는 ‘이미 떠난 버스’가 될 판이었다.
그해 12월5일 새벽 5시. 난 서울 상도동을 찾아갔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자택이다. 그때 YS는 김종필, 노태우와 더불어 3당을 합친 후 대표가 돼 사실상 당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보고 그 분을 찾아갔다. 이미 아내와 아이들에겐 “이제 공직생활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아내와 “저항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큰 아이의 응원이 더해졌기에 그나마 발걸음은 가벼웠다. <8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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